재계는 정부의 부실기업 조기퇴출 방침에 적극 협조해 구조조정을 가속화해
나가기로 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14일 오전 전경련회관에서 최종현회장 주재로 회장단
회의를 갖고 부실기업 정리에 대한 정부의 기준이 나오면 이에 적극
동참키로 합의했다.

이는 그동안 부실기업 조기퇴출방침에 집단반발 조짐을 보여왔던 재계
입장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회장단은 또 김대중대통령과 재계간 5대 합의사항 중 재무구조 개선과
구조조정이 가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기로 결의했다.

이와 함께 공장의 가동률을 높여 수출증대에 적극 나서기로 하고 가동률
제고를 위한 제도개선과 경상수지 5백억달러 흑자 달성을 위한 정부와의
협조에 앞장서기로 했다.

전경련 회장단이 이날 도출한 결론은 현재의 경제상황이 어려우니 정부
정책에 보조를 맞춰줘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 등 정부 당국자들이 이미 ''살생부'' 파문 해명에
나선 마당에 재계가 반발하는 인상을 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전경련 회장단은 당초 "부실기업 정리는 경제논리로 해결하라"는 정도의
입장표명은 할 것으로 예상됐었다.

"살생부" 파문이 확산되면서 기업들의 외자유치 협상이 올스톱되는 등
부작용이 오히려 확대 재생산되고 있어서다.

매물로 내놓은 회사나 부동산가격은 하락세를 멈추지 않고 있다.

일단 증권가의 ''살생부''에 올랐던 업체들은 대출금을 회수하려는 은행을
만류하느라 다른 경영활동을 할 틈이 없다.

"부실기업 기준과 정리 일정을 명확히 밝혀 건전한 기업에 피해를 주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는 주문을 사무국에 전한 회사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전경련 회장단이 이날 내놓은 "정부가 취하고 있는 모든 정책에
적극 동참해 국제 신인도를 높이는데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는 결의는
"대내용"이라기보다는 "대외용"으로 해석된다.

경제정책을 두고 정부와 재계가 사사건건 마찰을 빚는 듯한 인상을 외국에
주는 일만은 피하겠다는 "고육책"인 셈이다.

이날 경제위기 상황과는 걸맞지 않게 회장단회의 참석자가 7명에 불과
했다는 점도 이같은 해석을 뒷받침한다.

전경련 회장단이 이날 가동률을 극대화해 경제위기 극복에 앞장서겠다고
선언한 데서도 이런 고민의 흔적이 보인다.

자동차업종의 경우 1.4분기 평균 가동률이 42%에 불과할 정도로 국내
산업기반 붕괴가 우려되는 시점임을 강조한 것은 "살릴 생각"은 않는 정부에
대한 항변으로 봐야 한다.

정부에 "기업죽이기"보다는 "기업 소생책" 마련에 눈을 돌려주기를 요청
하는 메시지로도 해석된다.

실제로 IMF 이전 수준으로는 어렵지만 수출입금융확대 등 정부의 지원이
있으면 가동률은 다소 높일 수 있다는게 전경련의 판단이다.

그렇게 되면 일자리는 자연히 창출된다.

추가 생산품을 수출할 경우 경상흑자도 늘어난다.

업체는 매출이 늘어 운영자금이 확보된다.

협력중소업체에도 돈이 흘러간다.

도산위험은 현저히 줄어든다.

"살생부"가 아니라 "소생부"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사인인 것이다.

손병두 부회장이 브리핑에서 "정부의 부실기업 조기퇴출 계획의 목적은
기업과 경제를 살리는데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한 것은 이런 기대를 반영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기업들이 속앓이를 한 것이 이번뿐만은 아니다.

정부는 중화학업종이나 건설 등은 업종 특성상 부채비율을 1년내에 2백%로
낮추는 것이 불가능하다는걸 알면서도 방침을 굽히지 않고 있다.

기업신인도만 더 떨어뜨렸다는게 기업들의 불만이다.

또 기업들은 매각을 통해 구조조정을 조기에 가시화하라면서 정리해고는
절대 하지 말라는 압력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다.

기존 사원도 내보내야 하는 판에 정부는 인턴사원을 채용하라고 강요하고
있다.

"시장경제논리에 따라 제대로 하자"는 주장은 용납되지 않는 풍토다.

모그룹 관계자는 "성과 중심이어야 할 구조조정이 속도 우선으로 잘못
흐르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5월 1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