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한 <와이즈디베이스 대표/경제학 박사>

나라 경제가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도록 위기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갖가지 정부대책들이 난무하고 있다.

하루하루 쏟아져 나오는 대책들을 일일이 주워 섬기기조차 벅찰 지경이다.

면면을 들여다 보면 머리가 더 지끈거린다.

한마디로 앞날에 대한 그림이 안그려진다.

도대체 어디서 이 혼란이 비롯되는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민들은 큰 정치와 준비된 대통령의 의지에 탄복해
얼마든지 고통을 감내하겠다고 각오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기대가 절망으로 바뀌고 있다.

신정부 정책책임자들은 지나간 석달 동안 무엇을 어떻게 해왔는지 겸허하게
되돌아 보아야 한다.

과거와 무엇이 달라졌고 개선됐는지 돌이켜 반성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들여다 봐도 우리 정책담당자들의 행동에는 변화가 없다.

그야말로 구태의연하기 짝이 없다.

상암동 축구경기장 신축여부를 둘러싸고 석달동안 진행됐던 논란이
신축쪽으로 전격 결정되고, 5월 이후 격화된 노동자 시위사태에 직면해
6시간 근무제 도입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라는 대통령의 갑작스런 언급에
우리 국민들은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면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구태의연한 정책수립 방식에서 비롯되고 있다.

무엇보다 토론과 절차,합의가 없는 일방적인 정책수립과 하달 방식이
국민들을 멍들게 하고있다.

애당초 상암동 구장 신축은 절망에 빠진 우리 국민의 희망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또한 경제위기 극복과 21세기 한국의 위상 제고라는 관점에서 그 경제성을
충분히 인정받고 있던 계획이었다.

그러던 것이 사소한 정치논리에 함몰되면서 기존의 공감대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리저리 흔들려야만 했다.

문제는 이같은 정책입안 방식이 향후 다른 사안들에 미칠 영향이다.

상암동구장 신축안을 둘러싼 논란은 그 내용도 내용이지만 방법에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다수가 공감하지 못하는 방안들을 불쑥불쑥 제시하는 방식, 기존의
합의구조와 틀을 송두리째 무시해 버리는 전격주의가 문제인 것이다.

매사에 이런 식이 된다면 정말 곤란하다.

앞으로 수많은 정책을 입안하고 수행해야 하는 정책책임자들은 향후
다가올 새로운 사안들에 대해 반드시 투명한 의견수렴 절차를 거치고
이를 통해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얻어내면서 공감대를 형성하는 합리적이고
원칙있는 접근법에 입각해야만 한다.

실업대책도 마찬가지다.

현재 정부가 제시하는 각종 방안들은 순수한 의미에서 대책이라 볼수 없다.

오히려 미봉책에 더 가깝다.

기왕에 판을 새로 짤 요량이면 현상의 근본을 훑어내면서 기본 구조를
뜯어고치는 과감한 플레이가 필요하다.

이 역시 의견수렴과 설득, 공감대 형성이라는 절차를 통해 얼마든지
실현 가능한 일이다.

지금은 길거리에 나앉은 실업자들에게 월급을 나눠주는 방식보다는
재취업 기회를 제공하고 신산업분야를 중심으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내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노력이 필요한 때다.

수많은 잠재 실업자군에 대해서도 유사시 생계수당을 지급하겠다는 식의
접근법은 오히려 불안감과 공포감만 가중시킬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사.정 합의를 도출해 내기는 어려운 일이다.

고통분담의 차원에서 언급되고 있는 6시간 근무제 역시 잠재실업을
연장시키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유럽에서 주요 실업대책으로 채택되고 있는 근로시간단축제, 이른바
직무분담(jop sharing)은 노동강도의 저하와 전문생산성 하락을 야기해
해당 기업에 엄청난 비용과 부담을 줄수 있다.

이제 신정부 정책책임자들은 근본적으로 발상을 전환해야 할 시점에
있다.

국민과의 대화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경제 각 부문의
전문가 현장실무자들을 만나 의견을 모으고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론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메워질 수 있다.

우리에게는 감상에 사로잡혀 있을 시간이 없다.

고통을 어루만질 시간도 없다.

기업과 은행들에만 국제적인 행동기준을 강요할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정치와 정책수립 과정에도 그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더욱이 그러한 국제기준이 우리가 지향하는 민주적 시장경제의 효율적인
운영에 절실한 것이라면 서둘러 그렇게 해야 한다.

위기극복과 선진화를 위해서는 경제 뿐만 아니라 정치와 정책수립방식의
펀더멘털도 중요하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5월 1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