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4단계 금리자유화가 시행됐을 때의 일이다.

금융당국은 당시 은행들에 MMDA(시장금리부 수시입출식 예금)란 상품을
허용해 줬다.

그러나 은행들은 MMDA가 최저가입금액과 인출횟수에 제한이 있는데다
고금리를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상품판매를 기피했다.

그런데 한미은행과 장기신용은행이 갑자기 치고 나왔다.

두 은행은 가입금액에 따라 금리를 차등화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MMDA를
내놓았다.

기존의 자유저축예금(연2%)보다 최고 8%포인트까지 높은 금리를 제시했다.

자금이 몰렸다.

이후 은행들은 너나없이 비슷한 상품을 팔기 시작했다.

상품구조는 한미은행과 다를게 없었다.

어느 은행이 어느 정도 금리를 주느냐가 관건이었다.

국내은행들의 상품판매 전략은 이처럼 "사실상 부재" 상태다.

"금융=서비스"라는 개념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남들이 판매하는 상품을 비슷하게 베껴 내놓는 식이다.

IMF(국제통화기금) 사태이후 급박해진 금융환경에서도 이같은 행태는
바뀌지 않았다.

지난 2월 신한은행은 "단기회전예금"이란 상품을 내놓았다.

정기예금과 CD(양도성예금증서)를 결합한 상품.

장기투자고객과 단기고객의 수요를 모두 충족시키겠다는 취지였다.

일견 신선한 상품으로 부각됐다.

그러나 곧바로 경쟁관계에 있던 은행들이 따라왔다.

장기신용(맞춤실세예금) 하나(하나CD연동 정기예금)은행 등이 비슷한
상품을 판매했고 보람 상업은행 등도 뒤를 이었다.

최근 붐을 이루고 있는 "실직자돕기통장"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제일은행과 서울은행은 예금수익의 일부를 실직자후원기금에 출연하는 이
통장을 4월1일부터 팔았다.

다른 은행들이 가만 있을리 없었다.

은행들의 이같은 베끼기는 상품공동개발에 이르러 극에 달한다.

은행들은 비과세가계저축이 허용돼도, 근로자우대저축과 신종적립신탁이
허용돼도 상품을 함께 개발, 똑같은 상품을 판매했다.

바꿔 말하면 서로 피나는 경쟁을 하기 싫다는 계산이었다.

"미국식으로 따지면 이는 명백한 담합행위다. 공동 상품을 판매하다보니
남아있는 경쟁은 가격경쟁밖에 없었다. 고금리가 왜 지속되는지 이유를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한 외국계은행 임원의 지적을 되씹어볼 일이다.

< 이성태 기자 steel@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5월 2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