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혼돈의 근저 .. 이인영 <재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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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루 아침에 한국 경제가 이렇게 될 수가 있을까"
외환위기를 맞은 이후 주변에서 이런 질문을 자주 듣고 있다.
이럴 때마다 나는 반문한다.
"성수대교가 내려앉고 삼풍백화점이 폭삭 무너져 내리는데 며칠이
걸렸는가"라고.
널리 알려진 대로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은 무너지기 전 균열이나 다른
붕괴 조짐을 숱하게 보여 줬었다.
많은 관계자들이 그런 조짐을 가볍게 넘겼을 뿐이었다.
물론 설계나 건축 과정에서부터 문제가 있기도 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국가 경제의 붕괴 현장"을
지켜보면서, 삼풍백화점의 여직원들이 붕괴 건물더미 속에 깔리고 갇힌 채
죽어 가면서 외치고 또 외쳤을 절규를 짐작해 본다.
"그렇게 사회적으로 훌륭하고 유식한 분들이 많이 오가며 보았을 텐데
어떻게 아무도 대책을 세우지 않아 우리들이 이렇게 죽어가야 하는가"라고
말이다.
필자는 약 5년전부터 한국 방문시 만나는 기업이나 경제단체의 여러
간부들에게 한국 경제에 금이 가고 있어 큰 일이니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말해왔다.
경제학자는 아니지만, 한국 밖에서 보면 그것은 마치 건물 벽에 금이 간
것이 보이듯 명백한 것이었다.
유감이지만 나는 그들이 무슨 대책을 세웠는지 반문하고 싶다.
사실은 해외에 나와 있는 필자 자신을 비롯해 우리들 모두가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신문 지상에는 요즘 "환란"이라는 단어가 요란하다.
그러나 현 한국의 경제 상황이 단순히 "환란"이라면 외환 보유고의
증대로 간단히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무도 현 상황이 이처럼 간단히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않는다.
나아가 현 한국의 경제상황이 평범한 경제적 문제라면 경제학자들이 해결할
수도 있을 게다.
아니, 이미 한국의 경제문제가 해결돼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에는 유수한 경제학자가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경제가 혼돈 상태에 있는 것은 이것이 단순히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다.
오늘날 한국의 경제 위기와 혼돈 상황의 근원적 문제는 우리들 자신에게
있다.
우리 모두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과 한국 경제가 금이 가고 틈이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우리 모두 눈을 감았던 것이 위기의 근본 원인이었다.
상식적으로 볼 때 금이 가고 일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았다면 당연히
수리를 하고 보수를 해야 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그러한 경고 신호를 무시했다.
사고 가능성을 애써 부인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예방할 수 있었던 사고와 참사를 초래했다.
그러나 더 무서운 사실은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나아가 한국경제의 붕괴
사고가 난 이후 우리들이 보이고 있는 태도이다.
많은 생명이 헛되이 아깝게 죽어가고, 숱한 가장들이 일터에서 쫓겨나고
있는 데도 "사고"직후에만 요란한 반응을 보였을 뿐 원인을 찾아 악폐를
제거하는 노력을 다시 게을리하고 있다.
요란하기만 했지 아무런 실질적 대책이나 예방 장치를 제도적으로 마련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결국 사고의 희생자와 그 가족들만 억울할 뿐이다.
요행히 불똥을 맞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저 남의 일로 치부되고 있는
현실이다.
더욱이 IMF체제속에서 "요행히 불똥을 피한" 사람도 극소수일게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한국인들은 그토록 숱한 참사를 겪고도 그 원인을
철저히 규명하고 근본적인 예방책을 마련하는 일에 눈감고 있는 것인가.
긴 안목을 갖지 못하고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 가는 데 바쁘기 때문일까.
만약 우리가 "잘 살기 위해" 그렇게 바쁘다면 그것은 참으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우리의 그러한 생각과 수고가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이 오늘의 경제
위기를 통해 명백히 입증되고 있지 않는가.
똑같이 바쁘더라도 지금과 같이 낡은 발상이어서는 안된다.
지금까지의 외형위주 방식에 문제가 많았다는 것이 이번에 명백히 드러났다.
이제 문제는 외형이 아니라 내용이다.
바른 방향으로 뛰어야 한다는 것이다.
60년대 "잘 살아 보세"라는 새마을 노래가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고
있었을 때 서울 근교에서 목장을 하시던 어느 노인의 말씀이 생각난다.
"우리의 구호는 "바르게 살아 보세"여야 한다.
그러면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잘 살아 보세"라는 구호로는 결코 잘 살 수 없을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5월 29일자 ).
외환위기를 맞은 이후 주변에서 이런 질문을 자주 듣고 있다.
이럴 때마다 나는 반문한다.
"성수대교가 내려앉고 삼풍백화점이 폭삭 무너져 내리는데 며칠이
걸렸는가"라고.
널리 알려진 대로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은 무너지기 전 균열이나 다른
붕괴 조짐을 숱하게 보여 줬었다.
많은 관계자들이 그런 조짐을 가볍게 넘겼을 뿐이었다.
물론 설계나 건축 과정에서부터 문제가 있기도 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국가 경제의 붕괴 현장"을
지켜보면서, 삼풍백화점의 여직원들이 붕괴 건물더미 속에 깔리고 갇힌 채
죽어 가면서 외치고 또 외쳤을 절규를 짐작해 본다.
"그렇게 사회적으로 훌륭하고 유식한 분들이 많이 오가며 보았을 텐데
어떻게 아무도 대책을 세우지 않아 우리들이 이렇게 죽어가야 하는가"라고
말이다.
필자는 약 5년전부터 한국 방문시 만나는 기업이나 경제단체의 여러
간부들에게 한국 경제에 금이 가고 있어 큰 일이니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말해왔다.
경제학자는 아니지만, 한국 밖에서 보면 그것은 마치 건물 벽에 금이 간
것이 보이듯 명백한 것이었다.
유감이지만 나는 그들이 무슨 대책을 세웠는지 반문하고 싶다.
사실은 해외에 나와 있는 필자 자신을 비롯해 우리들 모두가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신문 지상에는 요즘 "환란"이라는 단어가 요란하다.
그러나 현 한국의 경제 상황이 단순히 "환란"이라면 외환 보유고의
증대로 간단히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무도 현 상황이 이처럼 간단히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않는다.
나아가 현 한국의 경제상황이 평범한 경제적 문제라면 경제학자들이 해결할
수도 있을 게다.
아니, 이미 한국의 경제문제가 해결돼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에는 유수한 경제학자가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경제가 혼돈 상태에 있는 것은 이것이 단순히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다.
오늘날 한국의 경제 위기와 혼돈 상황의 근원적 문제는 우리들 자신에게
있다.
우리 모두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과 한국 경제가 금이 가고 틈이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우리 모두 눈을 감았던 것이 위기의 근본 원인이었다.
상식적으로 볼 때 금이 가고 일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았다면 당연히
수리를 하고 보수를 해야 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그러한 경고 신호를 무시했다.
사고 가능성을 애써 부인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예방할 수 있었던 사고와 참사를 초래했다.
그러나 더 무서운 사실은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나아가 한국경제의 붕괴
사고가 난 이후 우리들이 보이고 있는 태도이다.
많은 생명이 헛되이 아깝게 죽어가고, 숱한 가장들이 일터에서 쫓겨나고
있는 데도 "사고"직후에만 요란한 반응을 보였을 뿐 원인을 찾아 악폐를
제거하는 노력을 다시 게을리하고 있다.
요란하기만 했지 아무런 실질적 대책이나 예방 장치를 제도적으로 마련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결국 사고의 희생자와 그 가족들만 억울할 뿐이다.
요행히 불똥을 맞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저 남의 일로 치부되고 있는
현실이다.
더욱이 IMF체제속에서 "요행히 불똥을 피한" 사람도 극소수일게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한국인들은 그토록 숱한 참사를 겪고도 그 원인을
철저히 규명하고 근본적인 예방책을 마련하는 일에 눈감고 있는 것인가.
긴 안목을 갖지 못하고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 가는 데 바쁘기 때문일까.
만약 우리가 "잘 살기 위해" 그렇게 바쁘다면 그것은 참으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우리의 그러한 생각과 수고가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이 오늘의 경제
위기를 통해 명백히 입증되고 있지 않는가.
똑같이 바쁘더라도 지금과 같이 낡은 발상이어서는 안된다.
지금까지의 외형위주 방식에 문제가 많았다는 것이 이번에 명백히 드러났다.
이제 문제는 외형이 아니라 내용이다.
바른 방향으로 뛰어야 한다는 것이다.
60년대 "잘 살아 보세"라는 새마을 노래가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고
있었을 때 서울 근교에서 목장을 하시던 어느 노인의 말씀이 생각난다.
"우리의 구호는 "바르게 살아 보세"여야 한다.
그러면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잘 살아 보세"라는 구호로는 결코 잘 살 수 없을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5월 2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