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D증권 영업부에 근무하던 이모(41)차장.

그는 최근 15년동안 일해오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말이 그만둔 것이지 사실은 권고 사직당했다.

이유는 개인 신용도 하락.

보증을 서준 동료 직원이 은행대출금을 갚지 못해 은행이 이 차장의 월급을
압류했다.

이 차장은 회사에 전후사정을 설명했지만 대고객 이미지관리차원이라며
대기명령을 받았다.

"회사를 위해 수년동안 봉사해온 결과가 결국 이런 것인가" 허탈감을 느낀
이 차장은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조그마한 제과회사에 다시 취업을 했다.

그리고 그는 제과기술을 배우고있다.

평생 직장보다는 평생직업(기술)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에서다.

IMF사태이후 샐러리맨들사이에 "평생직장"이라는 직장관은 깨지고있다.

직장생활은 이제 일정한 고용조건을 이행하는 계약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영원한 직업은 있어도 영원한 직장은 없다"라는 새로운 직업관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증권회사에서 먼저 시작됐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일반 제조업체 공기업 공공기관 등으로 확산되고있다.

구조조정과정에서 수백명에서 수천명의 직원을 명예퇴직 또는 권고사직
시키고있다.

명예퇴직이란 원래 정년을 1, 2년 앞둔 간부들이 후진을 위해 물러나는
제도이다.

그러나 최근의 명예퇴직은 과장에서부터 부장에 이르기까지 대상에 제한이
없다.

한창 일하는 과장들도 약간의 위로금을 받고 회사를 떠나고있다.

이 기회에 독립하자는 생각에서다.

노동부에따르면 올들어 권고사직은 지난 1월 1만6천1백명에서 3월
2만4천5백명으로 늘어났다.

또 정리해고도 1월에는 9천6백명이었으나 3월에는 1만2백명으로 증가했다.

반면 정년퇴직자는 1월 4천1백명에서 3월 1천2백명으로 줄어들었다.

회사를 그만둔 퇴직자들은 평생직장이 아닌 평생직업을 얻기위해 자신을
재충전하고있다.

일부는 제과기술을 배우기위해 학원문을 두드리고 있고 일부는 컴퓨터를
배우기위해 재취업프로그램기관을 찾고있다.

이에따라 학원이나 재취업기관은 퇴직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있다.

물론 최근 기업체의 인원감축이 일시적이라는 견해도 있다.

외환위기쇼크를 극복하기위해 몸집을 줄이는 과정에서 불가피하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우리 기업들이 임금제도를 바꾸고있고 외부전문인력을 활용하려는
움직임을 감안하면 평생직장은 점차 기대하기 힘들어질 것이란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우선 기업체들은 최근 연공서열식 인사제도 대신 연봉제를 도입하고있다.

연공서열식 인사제도 아래서는 선배직원이 항상 후배직원보다 먼저
승진한다.

따라서 특별한 사정이 없는한 정년까지 근무하는게 관행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연봉제하에서는 능력있는 직원이 봉급도 많이 받고 승진도 빠르다.

능력을 스스로 계발하지 않으면 자연 탈락할수밖에 없는 셈이다.

전문인력을 외부에서 채용하는 정책(아웃소싱)도 평생 직장관을 깨뜨린다.

기업체들은 기술이 급속하게 발전하고있는 점을 들어 특정업무를 외부
전문기관에 용역의뢰하거나 아예 해당분야 전문가를 채용하려는 경향을
보이고있다.

회사 내부에서 전문가를 키우기보다 외부시장에서 채용하는 편이 오히려
비용을 줄일수있다는 계산이다.

고급인력 컨설팅회사인 헤드헌트들이 급성장하고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정부도 전문가의 활동기회를 넓혀주고 기업들의 부담을 덜어주기위해
직업훈련의무제도를 내년부터 폐지할 예정이다.

전문가들은 취업의 기회가 넓어진 반면 사내 비전문가는 자연 도태될수
밖에 없는 상황이 곳곳에서 벌어지고있는 것이다.

물론 평생직장이 모든 회사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신기술개발로 사세가 확장되고있는 회사에서는 직원들이 장기근무할 수밖에
없다.

노동시장이 발달돼있는 미국에서도 휴렛팩커드, 인텔 등 초우량기업들은
단기근로자보다 장기근로자의 비중이 훨씬 많다(한국경영자총협회 안희탁
연구위원).

하지만 연봉제가 도입되고 전문인력을 외부에서 채용하려는 기업들의 추세를
감안하면 평생직장이라는 직장관은 변할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게 대체적인
의견인것 같다.

< 박주병 기자 jbpark@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