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산층의 몰락 ]]]

날개 잃은 중산층.

중산층이 추락한다.

감봉 정리해고 자산디플레 고물가가 한국의 중산층을 파산의 벼랑끝으로
내몰고 있다.

다이아먼드형 계층구조는 피라미드형, 심지어는 가운데가 쏙 들어간
표주박형으로 바뀌고 있다.

97년 11월까지 중산층은 희망에 가득찼다.

신혼살림을 단칸방에서 시작하더라도 "10여년동안 부지런히 저축하면
내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다.

승용차를 구입하면 부자가 된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푼푼히 긁어모은 주식은 부지런히 올라줬다.

IMF가 오기전까지는 그랬다.

대한상의의 조사에 따르면 올들어 월급쟁이의 월급감봉액은 평균 32.6%에
달한다.

저축은 고사하고 이자갚기에도 벅차다.

내집마련은 포기했다.

자동차를 팔아서 대출금이라도 갚아야할 형편이다.

보증서준 친인척이 부도로 나자빠져 덤터기를 쓰기도 한다.

언제 실직할지 모르는 어두운 그림자는 부담스럽게 쫓아다닌다.

중소기업 임원을 지낸 이구택(48)씨.

1억5천만원의 빚을 갚을 길이 없어 법원에 소비자파산신청을 냈다.

94년 주식투자에 손댄 그는 주가폭락으로 큰 손해를 봤다.

집을 팔고 명예퇴직금을 쏟아부으며 재기를 노렸지만 IMF는 회복불능상태로
그를 몰아갔다.

"파산자"로 선고받으면 빚부담은 없어지는 대신 앞으로 정상생활이 불가능
해진다.

빚에 짓눌려 어쩔 수 없이 택한 마지막 길이다.

올들어 서울 민사지법에 소비자파산을 신청한 사람은 이씨 말고도 56명이나
더있다.

지난 4월7일까지 33명이던 신청자는 두달이 가기도 전에 24명이나 늘었다.

회사의 채무보증을 선 부도업체 임원, 신용카드로 긁은 외상대금을 갚지
못한 회사원, 대출이자를 견디기 어려운 주부 등.

이중 7명은 이미 "파산자"가 됐다.

파산신청에 대한 문의는 끊이지 않는다.

빌린 돈이나 외상값을 갚지못해 금융기관으로부터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은 지난해 11월이후 하루 2천명씩 증가하는 추세다.

잠재적인 파산자들이다.

중산층의 몰락을 보여주는 또다른 현상은 거리에서 생활하는 홈리스
(Homeless)족의 등장이다.

서소문공원에 "둥지"를 튼 고영조(37)씨.

만나는 사람마다 "죽더라도 혼자 죽지 않겠다.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과
함께 죽겠다"고 맹세한다.

대기업 차장이었던 그가 노숙자가 된 건 그야말로 기막힌 "현실".

지난해 12월 정리해고에 떠밀려 실업자가 됐다.

아내는 대신 돈을 벌겠다며 보험설계사로 나가기 시작했다.

보험대리점 사장과 눈이 맞은 아내는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아졌다.

보다 못해 일을 그만두라 했지만 아내는 이혼요구로 답변을 대신했다.

자식들 생각에 갈라서지 못한 고씨는 차라리 집을 나오고 말았다.

서울역 용산역 시청역 등에는 고씨와 같은 노숙자들이 많다.

이른바 "IMF형 홈리스족"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여름 3백여명에 불과했던 노숙자수는 지난
2월말 전국적으로 약 1천명, 4월말 2천명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불었다.

6월말이면 3천명을 웃돈다는 예상도 나온다.

"이들의 76%는 실직 및 경제적인 이유로 노숙자가 됐다"고 1백88명을
면담했던 김미숙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밝혔다.

일할 의사가 있다는 점에서 알콜중독 현실도피 정신질환 등으로 길거리
생활을 하는 외국의 홈리스족과는 구별된다.

실직후 가족보기가 미안해서 혹은 파산으로 길거리로 나앉은 "비자발적"
홈리스가 대부분이다.

희망을 잃은 한국의 중산층.

개인파산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사회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이다.

< 정태웅 기자 redael@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