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백석농공단지 1블록에 있는 현대정기 공장안에 들어서면 열기로
가득하다.

벌겋게 달궈진 철물들이 열간프레스를 거치면서 단조부품이 돼나온다.

국제통화기금체제(IMF)이후 국내 기업들의 공장안이 한결같이 썰렁하지만
이 공장만큼은 무척 바쁘게 돌아간다.

미국 ADB사로부터 호이스트링 1백만달러어치를 주문받아서다.

호이스트링이란 공장안에서 물건을 들어올리는 장치.

이는 지난 27년간 오직 단조부품만을 생산해온 권순칠사장(56)이 직접
개발해낸 것.

이미 국제특허도 받아놨다.

그동안 대우 마티즈에 들어가는 기어블랭크, 농기계 트랜스미션, 유압하우징
등을 만들어온 이 회사로선 부품 제조기술 만큼은 세계적인 수준이 됐다.

그러나 수출시장을 뚫는덴 미숙했다.

카탈로그를 계속 보내도 별 반응이 없었다.

지난해 11월초의 일이다.

미국에서 온 바이어 한사람이 공장안을 둘러본뒤 두번 놀라더라는 것.

한가지는 기술수준이 매우 높은데 놀라고 다음은 카탈로그가 너무 조악한데
놀라더라는 것이다.

이 바이어의 권유로 권 사장은 정말 제대로 된 카탈로그를 만들어 보기로
결심했다.

막상 카탈로그 제작에 들어가자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점들이 발견됐다.

지금까지 사용하던 영어가 미국 바이어들에겐 전혀 맞지 않는다는 사실
이었다.

일례로 우리는 부품의 "적용방법"을 Application Information이라고 쓰지만
미국에선 Warning이라고 썼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단위.

미국은 아직 부품등의 단위를 인치 파운드 야드 등으로 쓴다.

그러나 우리가 제작한 카탈로그는 mm kg단위만 표기했다.

더욱이 인치단위로 주문받은 걸 mm단위로 환산해 제작하면 어김없이 오차가
발생해서 클레임이 걸렸다.

때문에 미국으로 내보내는 카탈로그에 mm만 쓴건 무용지물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권 사장은 이런 사실을 알고부터 지금까지 생산기술만 좋으면 잘 팔린다는
생각을 버렸다.

"카탈로그 제작도 기술이다"라고 마음먹었다.

그는 카탈로그 개발에 전념했다.

미국으로 출장가서 단조제품 카탈로그를 모두 모아 왔다.

제품을 개발할때처럼 온 정성을 쏟아 도안했다.

처음 2개월정도면 충분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4개월이 지나서야 시작품이
나왔다.

권 사장은 이 시작품을 미국의 헤럴드컨설팅에 보내 5번이나 자문을 받았다.

그때마다 잘못된 부분들이 나타났다.

6개월만인 지난 4월 드디어 완제품이 나왔다.

권 사장은 지난 연초 사업을 포기할 마음을 가지기도 했다.

자동차부품의 수요가 급감한데다 금융기관에서 자금상환까지 요청하는
바람에 사업의욕을 잃었었다.

그러나 카탈로그가 그를 살려냈다.

카탈로그를 보낸지 두달만에 1백만달러어치의 주문을 받은 것이다.

이번에 수출하는 호이스트링은 개당 2만달러까지 나가는 고가품이다.

그렇지만 제조원가는 판매가격의 30%밖에 안된다.

한마디로 수익이 짭짤한 제품.

권 사장은 요즘 다른 중소기업인들을 만나면 이렇게 물어본다.

"인치 카탈로그 있어요?"

이치구 < 중소기업 전문기자 rhee@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