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사장.

군사정권은 물론 문민정권시절에도 공기업사장 자리는 정권의 전리품쯤으로
취급됐던게 사실이다.

역대 공기업사장들의 면면을 보면 대번 알수있다.

대개 군출신이 아니면 장관자리를 놓고 경합끝에 밀려난 여권실세들이
태반이었고 나머지는 관료출신들이 채웠다.

하나같이 "비즈니스"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전문경영인 뺨치는 경영성과를 올린 이들도 있었지만
"자리차지" 그 자체에 만족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새 정부들어서도 이런 시각에서 어느자리에 어떤 사람이 임명되느냐에
시선이 몰렸다.

논공행상이 이뤄지는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였다.

하지만 공기업 민영화작업이 가시화되면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시각
에서 공기업사장에 대한 안팎의 관심이 드높다.

이들은 싫든 좋든 임기중에 조직개편이나 사업부문매각 등 대수술을 집도
해야 한다.

공기업 직원들이야 신임사장들이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기를 학수고대
하지만 막상 사장들에게 주어질 임무는 그런 기대와는 딴판이다.

"악역(?)"을 마다했다간 사장 스스로 정리해고 될 것이 뻔하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공기업 사장들은 요즈음 어느 민간회사 사장못지않게
고민이 많다.

새정권이 임명한 공기업 사장들은 대략 서너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먼저 "개혁 선봉장"그룹.

경영경험이나 전문성을 바탕으로 공기업 사장에 임명된 사람들이다.

공기업 경영효율성을 높여달라는게 새정부의 주문인 만큼 개혁도 빠르고
강하게 진행될 전망이다.

에너지 전문가로서 한국전력 첫 공채사장이 된 장영식 사장, 민간전문경영인
이었던 윤영석 한국중공업 사장, 그동안 공기업 경영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홍두표 한국관광공사 사장등이 이 범주로 분류된다.

다음은 정치권 인사 영입형.

주택공사 조부영 사장은 진작부터 공기업 사장 한자리를 맡을 것으로
얘기돼 왔다.

정권교체 과정에서 세운 공과 건설업체 경영경험이 감안됐다는 후문이다.

국민회의 성동갑 지구당위원장인 나병선 유개공 사장도 정치권에서 영입된
케이스다.

소관부처 고위공직자 출신들도 공기업 사장에 다수 포진해 있다.

해당 부처에서 전관예우 차원에서 자리를 만들어 준 것으로 해석된다.

물론 본인이 직접 개척한 경우도 있다고 들린다.

이들 대부분은 공직시절 해당 공기업 업무를 다뤄본 경험이 있다.

업무를 제대로 파악해서인지 장수하는 사례도 많다.

김은상 KOTRA사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갑수 가스공사 사장, 김태곤 지역난방공사 사장, 이계철 한국통신 사장,
이병길 석공사장 등은 관료출신형에 속한다.

이병길 사장은 국가에 마지막으로 봉사해 달라는 산업자원부 후배들의
요청을 고사하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공개모집 1기형"도 있다.

지난해 공기업 민영화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취해진 사장 공모에서 뽑힌
사람들이다.

이계철 한국통신 사장, 김재홍 담배인삼공사 사장, 한갑수 가스공사 사장
등이다.

한국중공업 공모 1기 사장인 박운서씨는 일신상의 이유로 퇴임했다.

윤사장은 공모 2기인 셈이다.

한전 장영식 사장은 올해 뒤늦게 공모 1기에 합류했다.

새정부 공기업 사장들의 특징중 하나는 내부 승진형이 많다는 점이다.

담배인삼공사 한국종합기술금융 농어촌진흥공사 수자원공사 토지공사는
사장을 자체에서 배출했다.

속사정을 잘아는 사람들에게 경영을 맡겨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의미로
여겨진다.

담배인삼공사를 제외하며 이들 모두는 공익성이 강한 공기업으로 분류된다.

새로 임명된 공기업 사장들 가운데 호남 출신 인사가 드물다는 점도 눈에
띈다.

13명중에서 호남지역이 출생지인 사람은 3명(한전 유개공 광진공)뿐이다.

나머지는 서울 경기 경남북으로 분산됐다.

굳이 꼽자면 자민련 당직자 출신인 조부영 사장은 여권 인사에 속한다.

군출신도 많지 않다.

별들의 잔치판이었던 5,6공과 사뭇 대조되는 모습이다.

예비역 장성이 경영을 맡은 공기업은 3곳(농수산물유통공사 유개공 광진공)
이다.

하지만 입지전적 인물은 무척 많다.

중소도시 비인문계 고등학교 출신이 사령탑을 맡은 공기업이 꽤 된다.

공기업 사장들의 연배(평균나이 59.5세)에 비춰 가난한 시골수재들의
성공담으로 여겨진다.

취직 때문에 상고 농고 공고를 택했다가 대학이나 사관학교 진학으로
진로를 바꾼 사례는 50년대말 그리 드물지 않았다.

< 박기호 기자 khpark@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