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입삼 회고록 '시장경제와 기업가 정신'] (11) 5개년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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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바랜 청사진 ''5개년 계획'' ]]
61년 3월 중순 화창한 봄햇살이 창을 통해 길게 비치던 맑은 날이었다.
연일 데모로 지새우던 때였지만 산업개발위원회 사무실이 있는 퇴계로
입구는 그날 따라 조용했다.
부흥부 고문으로 내한한 미국의 찰스 울프 박사와 한국 관계자들간의
합동회의가 열린 날이었다.
나는 이날 울프박사에게 마무리 단계에 있는 "5개년계획"에 대해
브리핑했다.
이 계획은 58년 3월15일 설립된 부흥부 산하기구인 산업개발위원회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당시 이 위원회의 보좌위원이었다.
4년10개월 동안 미국과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것이 59년 6월.
곧바로 이 위원회에 들어가 계획작성에 참여했다.
귀국한지 1년이 채 못됐던 때 쟁쟁한 선배 전문가가 많은데도 내가
브리핑한다는 것은 어느모로나 적임은 아니었다.
나중에 알게됐지만 유학을 다녀왔으니 최소한 영어는 잘 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기대를 가졌던 모양이다.
한국 경제에 대해선 나도 풋내기지만 갓 내한한 울프박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치기로 브리핑을 시작했다.
브리핑 요지는 우리나라도 이제는 장기구상을 갖고 경제발전계획을
실천해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지는 이랬다.
1) 휴전후 5년이 채못돼 전쟁 악성인플레를 수습하고 4.19 대혼란기에도
물가가 안정됐다.
경제안정 없이는 장기계획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2) 8.15해방 후 광적인 교육열과 엄청난 인력양성 등으로 인해 경영과
기술력이 급격히 향상됐다
3) 57년을 전환점으로 한국경제는 전쟁의 상처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났다.
그래서 한차원 높은 발전을 해야 한다는 새로운 문제의식이 생겼다
4) 이 문제의식이 장기계획 작성으로 이어졌다.
5개년 계획을 만들게된 동기를 주로 설명한 것이다.
그리곤 울프 박사에게 "5개년 계획을 작성하는데 있어 감안해야할
개발전략과 자원조달방안 작성기법 등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사실 자유당, 민주당 시절 장기계획 작성의 기반이 된 물가와 경제안정은
미원조 당국과 한국 정부의 협약으로 실시되고 있던 "재정안정계획"
덕택이었다.
53년부터 시작된 이 재정안정계획의 강력한 집행으로 전쟁 악성 인플레를
수습할 수 있었다.
휴전 후 얼마되지 않아 전쟁 피해를 거의 복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울프박사에게 한국 경제주체들의 경제운영 능력, 특히 발전 잠재력을
강조했다.
실제로 57년부터 59년 사이에는 오히려 물가가 하락하기까지 했다.
연이어 풍년이었고 19공탄도 충분히 생산돼 값이 크게 떨어졌다.
나는 맹자의 말을 인용해 "효의 근본은 노부모를 등 덥고 배부르게 해
드리는 것"이라며 바로 이 때가 맹자의 말이 실현되는 시기라고 했다.
(5.16이후 군사정권은 5개년계획의 필수전제인 경제 안정 개념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결국 외화는 고갈됐고 인플레까지 겹쳐 3년만에 "보완계획"으로 대폭
수정해야 했다.
오늘날 국제통화기금(IMF)의 간섭까지 받게 된 원인은 이미 이때에
잉태됐다고 할 수 있다)
울프박사에게 특히 자신있게 설명했던 부분이 기억난다.
바로 우리의 교육열이었다.
나는 이를 인적자원투자와 연결시켜 거듭 강조했다.
6.25 직후 부산피란 시절 군텐트로 임시교실을 만들어 서울의 명문대학들이
합동강의를 했던 사실을 실감나게 전했다.
"한국인들의 기술습득 능력은 전쟁 속에서도 사상 유례없을 정도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울프박사도 인정하겠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부 보완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가 특별한 오류를 지적하지 않자 계획작성 참여자들은 안도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이 5개년 계획은 5.16쿠데타로 결국 "빛바랜
청사진"이 되고 만다.
이전에 만들었던 3개년계획과 꼭 같은 운명이었다.
산업개발위원회가 처음 만든 장기발전구상은 "경제개발 3개년 계획,
1960~62"였다.
4.19직전인 60년 4월15일, 우여곡절 끝에 이승만정부는 이를 정식으로
채택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4.19로 인해 버려졌다.
민주당 정부는 새로 "5개년 계획"을 만들었다.
필자가 울프박사 앞에서 브리핑했던 바로 그 계획이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이 계획을 바탕으로 "신5개년 계획"을 또 다시 작성하게
된다.
수년의 세월이 계획만 짜다가 낭비된 것이다.
내 책상에는 지금도 "경제개발 3개년 계획, 단기 4293년도(1960),
부흥부 산업개발위원회"라고 등사된 누렇게 빛바랜 원본이 놓여있다.
끝내 실현되지 못한 이 계획에 심혈을 기울인 주원 위원장을 비롯한 여러
참가자들을 기리는 뜻에서 몇 구절만 인용해 보자.
제1장 "장기경제개발 계획의 의의"에 이런 내용이 눈에 띈다.
"생산성은 낮고 실업률은 15%를 상회해 국민의 1인 소득은 90달러
미달...국민 문맹은 4.01% 미만이고 교육열은 왕성하며 근면절약할 뿐만
아니라, 자유 독립정신은 관념이라 하기보다는 오히려 체험적이다"
독일 철학 서적에서 보는 표현같기도 하나 호소하는 의미는 가슴깊이 와
닿는다.
밤늦게까지 숫자 하나,자구 하나를 다듬으며 나중에 외국전문가들은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온 신경을 쓰던 선배 동료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15일자 ).
61년 3월 중순 화창한 봄햇살이 창을 통해 길게 비치던 맑은 날이었다.
연일 데모로 지새우던 때였지만 산업개발위원회 사무실이 있는 퇴계로
입구는 그날 따라 조용했다.
부흥부 고문으로 내한한 미국의 찰스 울프 박사와 한국 관계자들간의
합동회의가 열린 날이었다.
나는 이날 울프박사에게 마무리 단계에 있는 "5개년계획"에 대해
브리핑했다.
이 계획은 58년 3월15일 설립된 부흥부 산하기구인 산업개발위원회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당시 이 위원회의 보좌위원이었다.
4년10개월 동안 미국과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것이 59년 6월.
곧바로 이 위원회에 들어가 계획작성에 참여했다.
귀국한지 1년이 채 못됐던 때 쟁쟁한 선배 전문가가 많은데도 내가
브리핑한다는 것은 어느모로나 적임은 아니었다.
나중에 알게됐지만 유학을 다녀왔으니 최소한 영어는 잘 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기대를 가졌던 모양이다.
한국 경제에 대해선 나도 풋내기지만 갓 내한한 울프박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치기로 브리핑을 시작했다.
브리핑 요지는 우리나라도 이제는 장기구상을 갖고 경제발전계획을
실천해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지는 이랬다.
1) 휴전후 5년이 채못돼 전쟁 악성인플레를 수습하고 4.19 대혼란기에도
물가가 안정됐다.
경제안정 없이는 장기계획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2) 8.15해방 후 광적인 교육열과 엄청난 인력양성 등으로 인해 경영과
기술력이 급격히 향상됐다
3) 57년을 전환점으로 한국경제는 전쟁의 상처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났다.
그래서 한차원 높은 발전을 해야 한다는 새로운 문제의식이 생겼다
4) 이 문제의식이 장기계획 작성으로 이어졌다.
5개년 계획을 만들게된 동기를 주로 설명한 것이다.
그리곤 울프 박사에게 "5개년 계획을 작성하는데 있어 감안해야할
개발전략과 자원조달방안 작성기법 등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사실 자유당, 민주당 시절 장기계획 작성의 기반이 된 물가와 경제안정은
미원조 당국과 한국 정부의 협약으로 실시되고 있던 "재정안정계획"
덕택이었다.
53년부터 시작된 이 재정안정계획의 강력한 집행으로 전쟁 악성 인플레를
수습할 수 있었다.
휴전 후 얼마되지 않아 전쟁 피해를 거의 복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울프박사에게 한국 경제주체들의 경제운영 능력, 특히 발전 잠재력을
강조했다.
실제로 57년부터 59년 사이에는 오히려 물가가 하락하기까지 했다.
연이어 풍년이었고 19공탄도 충분히 생산돼 값이 크게 떨어졌다.
나는 맹자의 말을 인용해 "효의 근본은 노부모를 등 덥고 배부르게 해
드리는 것"이라며 바로 이 때가 맹자의 말이 실현되는 시기라고 했다.
(5.16이후 군사정권은 5개년계획의 필수전제인 경제 안정 개념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결국 외화는 고갈됐고 인플레까지 겹쳐 3년만에 "보완계획"으로 대폭
수정해야 했다.
오늘날 국제통화기금(IMF)의 간섭까지 받게 된 원인은 이미 이때에
잉태됐다고 할 수 있다)
울프박사에게 특히 자신있게 설명했던 부분이 기억난다.
바로 우리의 교육열이었다.
나는 이를 인적자원투자와 연결시켜 거듭 강조했다.
6.25 직후 부산피란 시절 군텐트로 임시교실을 만들어 서울의 명문대학들이
합동강의를 했던 사실을 실감나게 전했다.
"한국인들의 기술습득 능력은 전쟁 속에서도 사상 유례없을 정도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울프박사도 인정하겠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부 보완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가 특별한 오류를 지적하지 않자 계획작성 참여자들은 안도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이 5개년 계획은 5.16쿠데타로 결국 "빛바랜
청사진"이 되고 만다.
이전에 만들었던 3개년계획과 꼭 같은 운명이었다.
산업개발위원회가 처음 만든 장기발전구상은 "경제개발 3개년 계획,
1960~62"였다.
4.19직전인 60년 4월15일, 우여곡절 끝에 이승만정부는 이를 정식으로
채택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4.19로 인해 버려졌다.
민주당 정부는 새로 "5개년 계획"을 만들었다.
필자가 울프박사 앞에서 브리핑했던 바로 그 계획이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이 계획을 바탕으로 "신5개년 계획"을 또 다시 작성하게
된다.
수년의 세월이 계획만 짜다가 낭비된 것이다.
내 책상에는 지금도 "경제개발 3개년 계획, 단기 4293년도(1960),
부흥부 산업개발위원회"라고 등사된 누렇게 빛바랜 원본이 놓여있다.
끝내 실현되지 못한 이 계획에 심혈을 기울인 주원 위원장을 비롯한 여러
참가자들을 기리는 뜻에서 몇 구절만 인용해 보자.
제1장 "장기경제개발 계획의 의의"에 이런 내용이 눈에 띈다.
"생산성은 낮고 실업률은 15%를 상회해 국민의 1인 소득은 90달러
미달...국민 문맹은 4.01% 미만이고 교육열은 왕성하며 근면절약할 뿐만
아니라, 자유 독립정신은 관념이라 하기보다는 오히려 체험적이다"
독일 철학 서적에서 보는 표현같기도 하나 호소하는 의미는 가슴깊이 와
닿는다.
밤늦게까지 숫자 하나,자구 하나를 다듬으며 나중에 외국전문가들은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온 신경을 쓰던 선배 동료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1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