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용출 < 서울대 교수.외교학 yong@plaza.snu.ac.kr >

국내 정치 경제 사회가 외환 위기로 야기된 경제문제 해결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이번 위기는 우리 사회 모든 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적 개혁과제를 수행하면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이 위기의
이면에 내재하는 국제적 측면이다.

이번 위기의 국제적 배경은 무엇보다도 냉전체제의 종식이다.

냉전체제의 특징은 미.소를 종주국으로 하는 안정된 안보.정치경제
질서였다는 점이다.

특히 안보.군사적 경쟁을 위해 후진국들이 경제적 이익을 희생하는
체제였다.

동구 사회주의국가들은 소련으로부터 세계시장 가격보다 3분의1이 싼
석유를 얻어썼으며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은 미국 시장의 일방적
개방을 통해 수출을 신장시켰다.

냉전체제의 국내적 측면은 비시장성 논리의 체계적 침투였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경우 주한미군 예산의 3분의1이상이 국방비에
지출되었다.

이는 비시장성 논리가 우리 경제.사회.행정체제에 쉽게 스며드는 계기가
되었다.

냉전체제는 또한 대안적 이데올로기 존재와 이의 경쟁및 갈등을 특징으로
하였다.

사회주의의 현주소였던 소련의 멸망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승리를
의미했는지는 모르지만 상반된 세계관과 정책대안 발전전략이 공존.경쟁하는
체제였다.

안정되고 예측가능했던 냉전체제의 종식은 국제 정치.경제질서에 커다란
혼란을 초래했다.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제3세계의 종말을 가져왔는지 몰라도 경제.정치적으로
제4세계를 출현시켰다.

민족국가체제와 시장경제제도 도입및 완성이 요원한 중앙아시아지역은
중장기적으로 불안정의 요인이 될 것임엔 틀림없다.

서구 진영 역시 공동의 적으로 뭉쳤던 과거에서 이제 공동의 가상적을
상정하는 체제로 바뀌면서 각종 불협화음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NATO 확장문제, 유고사태 등이 바로 그것이다.

불안한 요인은 동아시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냉전구도가 비교적 남아있어 표피적 안정성을 보이고 있으나 한반도, 일.러
영토분쟁, 남사군도 문제, 대만과 중국의 관계 등 복잡한 과제를 안고 있다.

경제적 차원에서도 냉전 체제에 안주했던 정도에 따라 문제의 심각성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소련 동구와 같이 국제체제에 전혀 연계되어 있지 않던 국가들의 경우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으며, 정반대로 유럽과 미국은 기존의
시장체제 운영을 가속하며 이를 바탕으로 세계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다.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은 이 양극단의 중간 위치에 놓여있다.

따라서 앞으로 국제 정치.경제 구도는 유럽과 미국의 세계시장을 향한
끊임없는 경쟁과 동북아시아가 이들 틈바구니에서 중국 일본을 중심으로
얼마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느냐에 의해 그 윤곽이 판정될 것이다.

또한 러시아를 중심으로 신.구 사회주의권의 경제회복 속도와 정치적
안정의 정도가 또 하나의 축을 형성할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다.

현재 많은 아시아 중동아프리카및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그들의 상대적
낙후성을 쉽게 극복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21세기에 이 지역국가들이 20세기 중반처럼 냉전의 보호하에 신흥개발국가로
변모할 가능성은 아주 적어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또 하나의 신제국주의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관련, 주목되는 것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양상과 유사한
자본주의의 다양한 유형과 관련된 논쟁과 블록 형성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미 프랑스와 독일 등지에서 나타나고 있는 제국식 시장 중심의 국제및
지역체제 구축이 초래하고 있는 불평등과 무질서, 혼란, 인간의 고통 증가
등에 대한 논란은 이러한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다.

눈 앞에 닥친 위기 관리에 여념이 없는 우리에게 이러한 시대 상황의 진단은
강건너 불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기억해야할 점은 냉전체제하에서 우리는 독자적으로 세계를 예측하고
그에 대응하는 힘을 기르지 못해 오늘날의 위기를 맞았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과거 역사는 항상 국제조류에 뒤져 다급하게 과거청산과 시대
과업달성을 동시에 하지않으면 안되었던 뼈아픈 경험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이 보여주는 것이 있다면 단기적 대응을 하면서 동시에 미래 예측에
기반한 우리 자신의 고유한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과거 유산의 청산 수단으로의 시장화와 우리 미래 체제 구상에서 시장의
범위와 역할은 분명히 구별되어 접근해야 할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2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