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새로운 구호가 필요하다..정진홍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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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 < 서울대 교수. 종교학 >
산다는 것은 참 어렵다.
짐짓 의연하려 해도 구체적으로 부닥치는 삶이란 쉽지 않다.
그런데 이 어려움은 삶을 이루는 온갖 것들이 서로 뒤엉켜 다듬어지지
않을뿐만 아니라 그러한 삶의 현실을 도무지 의미를 지닌 것으로 여길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혼란, 갈등, 부조화, 갖추지 못하고 있음, 판단정지, 절망 등은 그러한
모습을 그리는 용어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이러한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려 애를 쓴다.
사람이 앎을 추구하고 의미에 대한 물음을 묻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계기에서 비롯한다.
한데 뒤엉켜 뒤죽박죽인 사태를 풀고 다듬어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면서
그것들의 관계를 살피고 그러한 사실이 갖는 의미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엉망이던 삶이 조금씩 가닥이 잡히고 판이 좀 다듬어지면
삶을 견디는 일이 그만큼 수월해진다.
그러므로 삶이 힘들수록 우리는 그러한 정황을 살펴 왜 이렇게 됐고, 지금
형편이 어떻고, 어떻게 해야 이 자리를 뚫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를 찾고
새로운 의미의 차원에서 그 인식과 판단을 다듬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물론 삶의 어려움이 당장 끼니를 잇지 못하여 굶어죽는 일이 일상일
정도라면 사태는 다르다.
그때 부닥치는 것은 혼란이 아니라 아예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앎이나 의미를 추구하기보다 우선 배가 불러야 한다.
상황에 대한 인식이나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배부른 다음에야 비로소
직면하는 다른 문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비록 생존의 문제와 인식 및 의미의 문제가 서로 단절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삶의 형편이 그러한 처절한 사정이 아니라면 그때
직면하는 어려움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그 형편에 대한 앎과 그것이 갖는
의미를 추구하는 일부터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정황과 그 안에 있는 삶의 주체를 분석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냉정하게 서술하고 평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형편이 이러한 듯 싶다.
참 어려운 시기다.
경제만이 아니다.
우리 공동체의 온갖 영역에서 그러한 어려움이 현실화하고 있다.
척도의 혼란, 준거의 상실, 가치의 전도, 상식의 표류를 우리는 경험한다.
따라서 앎과 의미에 대한 물음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그러나 그러한 물음과 그 물음에 대한 진지한 답변의 모색을 별로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집단 이기적인 자기 정당화의 주장이 지성적인 인식의 내용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그러한 자기 정당화는 언제나 윤리적으로 수식된다.
앎도 의미도 모두 왜곡과 훼손의 폭력 밑에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소용돌이 안에서도 저항없는 표어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허리띠를 졸라매자"라든가 "다시 뛰자"라는 구호들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구호들에 대한 충분한 공감을 지닌다.
때로는 상당한 감동조차 느낀다.
우리는 그러한 구호로 삶의 어려움, 그것도 처절한 배고픔을 견뎌낸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경험을 다시 반복하자는 당위성을 함축하고 있는 그러한
표어들이 과연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이 어려움에서도 타당한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묻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것은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고 삶이 지니는 근원적인 의미의 문제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삶의 현장에 대한 무지,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한 불감증이
우리가 부닥친 어려움의 깊은 까닭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절실한 구호는 "허리띠를 졸라매자"가 아니라
합리적이고 분석적이며 비판적인 인식을 도모하자는 의미에서 머리를
쓰자라는 표어이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뛰자"가 아니라 왜, 어떻게, 어디를 향해서 뛰어야 하는지를 되묻는
의미에서 "가끔은 멈춰서자"라는 구호이지 않으면 안된다.
허리로부터 머리로, 그리고 다리에서부터 가슴으로 우리의 의식을 옮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동물적인 본능의 구호로부터 참으로 인간적인 자존의 구호로 바뀌지
않으면 이러한 구호들에 대한 감상적인 공감은 우리의 혼란을 더 오래
지속하게 하는 또 하나의 기만적인 기능을 할는지도 모른다.
그 구호들은 어쩌면 앎과 의미 이전일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참으로 두려운 것은 그 동물적 구호만을 외치고 있다가 정말 그 구호가
타당성을 가지는 현실이 전개될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27일자 ).
산다는 것은 참 어렵다.
짐짓 의연하려 해도 구체적으로 부닥치는 삶이란 쉽지 않다.
그런데 이 어려움은 삶을 이루는 온갖 것들이 서로 뒤엉켜 다듬어지지
않을뿐만 아니라 그러한 삶의 현실을 도무지 의미를 지닌 것으로 여길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혼란, 갈등, 부조화, 갖추지 못하고 있음, 판단정지, 절망 등은 그러한
모습을 그리는 용어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이러한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려 애를 쓴다.
사람이 앎을 추구하고 의미에 대한 물음을 묻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계기에서 비롯한다.
한데 뒤엉켜 뒤죽박죽인 사태를 풀고 다듬어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면서
그것들의 관계를 살피고 그러한 사실이 갖는 의미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엉망이던 삶이 조금씩 가닥이 잡히고 판이 좀 다듬어지면
삶을 견디는 일이 그만큼 수월해진다.
그러므로 삶이 힘들수록 우리는 그러한 정황을 살펴 왜 이렇게 됐고, 지금
형편이 어떻고, 어떻게 해야 이 자리를 뚫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를 찾고
새로운 의미의 차원에서 그 인식과 판단을 다듬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물론 삶의 어려움이 당장 끼니를 잇지 못하여 굶어죽는 일이 일상일
정도라면 사태는 다르다.
그때 부닥치는 것은 혼란이 아니라 아예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앎이나 의미를 추구하기보다 우선 배가 불러야 한다.
상황에 대한 인식이나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배부른 다음에야 비로소
직면하는 다른 문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비록 생존의 문제와 인식 및 의미의 문제가 서로 단절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삶의 형편이 그러한 처절한 사정이 아니라면 그때
직면하는 어려움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그 형편에 대한 앎과 그것이 갖는
의미를 추구하는 일부터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정황과 그 안에 있는 삶의 주체를 분석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냉정하게 서술하고 평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형편이 이러한 듯 싶다.
참 어려운 시기다.
경제만이 아니다.
우리 공동체의 온갖 영역에서 그러한 어려움이 현실화하고 있다.
척도의 혼란, 준거의 상실, 가치의 전도, 상식의 표류를 우리는 경험한다.
따라서 앎과 의미에 대한 물음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그러나 그러한 물음과 그 물음에 대한 진지한 답변의 모색을 별로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집단 이기적인 자기 정당화의 주장이 지성적인 인식의 내용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그러한 자기 정당화는 언제나 윤리적으로 수식된다.
앎도 의미도 모두 왜곡과 훼손의 폭력 밑에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소용돌이 안에서도 저항없는 표어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허리띠를 졸라매자"라든가 "다시 뛰자"라는 구호들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구호들에 대한 충분한 공감을 지닌다.
때로는 상당한 감동조차 느낀다.
우리는 그러한 구호로 삶의 어려움, 그것도 처절한 배고픔을 견뎌낸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경험을 다시 반복하자는 당위성을 함축하고 있는 그러한
표어들이 과연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이 어려움에서도 타당한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묻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것은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고 삶이 지니는 근원적인 의미의 문제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삶의 현장에 대한 무지,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한 불감증이
우리가 부닥친 어려움의 깊은 까닭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절실한 구호는 "허리띠를 졸라매자"가 아니라
합리적이고 분석적이며 비판적인 인식을 도모하자는 의미에서 머리를
쓰자라는 표어이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뛰자"가 아니라 왜, 어떻게, 어디를 향해서 뛰어야 하는지를 되묻는
의미에서 "가끔은 멈춰서자"라는 구호이지 않으면 안된다.
허리로부터 머리로, 그리고 다리에서부터 가슴으로 우리의 의식을 옮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동물적인 본능의 구호로부터 참으로 인간적인 자존의 구호로 바뀌지
않으면 이러한 구호들에 대한 감상적인 공감은 우리의 혼란을 더 오래
지속하게 하는 또 하나의 기만적인 기능을 할는지도 모른다.
그 구호들은 어쩌면 앎과 의미 이전일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참으로 두려운 것은 그 동물적 구호만을 외치고 있다가 정말 그 구호가
타당성을 가지는 현실이 전개될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2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