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입삼 회고록 '시장경제와 기업가 정신'] (13) '경제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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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당, 경제제일주의 표방 ]
민주당 정부는 "5개년 계획"을 수립할 정도로 경제에 열의를 보였다.
민주당 정부의 의욕은 60년 12월15일부터 5일간 계속된 "종합경제회의"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당시 산업개발위원회 소속이었던 나는 이 회의에 간사로 파견됐다.
이 색다른 이름의 회의는 당시 장면 정부가 의욕을 갖고 경제정책에 대한
각계 의견 수렴을 목적으로 조직한 일종의 공청회였다.
참가자는 윤보선 대통령, 장면 총리를 포함한 정부 고위 인사들부터
지방각지의 독농가까지 광범했다.
경제계 기술계 학계 언론계 인사 등 모두 2백여명이나 됐다.
당시 오피니언리더들이 모두 참가한 매머드급회의였다.
내가 이 회의를 특별히 소개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우선 나는 이 회의를 통해 나름대로 한국경제발전 구상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또 나중에 전경련 사무국을 책임지면서 벌였던 각종 사업의 아이디어들을
이 회의를 통해서 얻었다.
간사로서는 1주일에 불과한 역할이었지만 다양한 사람들을 접촉했다.
특히 백출하는 의견들은 나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다.
이를테면 전경련 사무국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설립한 "한국경제 기술조사
센터"(한국경제연구원 전신)의 착상은 이 회의의 산업구조개편 분과위원회
에서 얻었다.
당시 한국경제협의회 준비위원이었던 한 기업인은 이 협의회 창립
준비회의에서 제기된 내용이라며 이를 "건의서"에 포함시켜달라고 주장했다.
그는 "천우사 전택보 사장이 이미 자유당 정부 때부터 "보세가공"을 시작해
외화획득과 함께 많은 일자리를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당시 한국경제
협의회는 여러 차례 준비회의를 거쳐 취지문 정관 등을 이미 마련했고 61년
1월10일에 개최할 창립총회만 기다리는 상태였다)
그런데 보세가공이란 말의 뜻을 대부분이 알아듣지 못했다.
참석자들 대부분은 금시초문인 것 같았다.
보세가공뿐 아니라 지금은 일반화된 경제용어나 신개념들에 대해 오피니언
리더들도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그때 나는 사회각계, 특히 경제인과 여타 분야 인사들을 위한 의견교환의
장이 절실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전경련 사무국장이 되자마자 한국경제기술조사센터를 설립한 것이다.
내가 직접 쓴 설립취지문은 이렇게 돼있다.
"학계 기술계의 학문적인 예지와 경제인들의 경험이 혼연일체가 돼 한국형
발전전략을 안출함을 목표로 삼는다"
종합경제회의가 의미를 갖는 것은 5.16 군사정부가 초창기에는 이 회의건의
내용을 정책의 교본으로 삼다시피 했다는 점 때문이다.
하나만 예를 들자면 박정희 군사정부는 출범 2개월후 "경제기획원"을
신설하고 "신5개년 계획" 추진을 천명했다.
그런데 이 경제기획원은 바로 종합경제회의에서 제기된 것을 이름만 바꿔
빌려쓴 것이다.
종합경제회의 건의문에 담긴 내용은 이렇다.
"국무총리 직속에 경제계획원(가칭)을 둔다.
이 계획원은 국가의 재정 산업 통상 금융의 민주화를 이룩함으로써
한국경제의 균형과 경제성장에 기여할 것을 목표로 한다" 재정 산업 통상
금융의 "민주화"를 역설한 점이 특히 눈에 띈다.
지금 정부가 표방하고 있는 "민주 시장경제주의"를 연상케하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박정희 정부가 이 건의서에 "차용"한 정책은 "농어촌고리채 정리"
등 한 두가지가 아니다.
이는 나중에 다시 언급할 것이다.
나는 이 회의를 통해 민주당 정부 수뇌들의 정세 판단, 경제구상, 결의
등을 직접 접할 수 있었다.
여기에 자유당 시절의 3개년계획,민주당 때의 5개년계획 작성에 참여해
얻은 지식을 합쳐 내 나름의 경제발전 구상의 윤곽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면 종합경제회의의 결론이라 할 "경제발전을 위한 대정부 건의" 내용을
살펴보자.
이 회의에선 <>행정기구 <>재정금융 <>산업구조 <>공기업 <>국제수지
<>고용 및 생활수준 <>지방개발사업 등 7개 분과위원회로 나뉘어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
대통령과 총리도 참석해 민주당 정부의 경제정책을 설명했다.
윤보선 대통령의 인사말에선 비장함마저 느낄 수 있다.
"허탈상태에 있는 전국민에게 의욕과 희망, 그리고 분발을 촉구합니다.
패전에서 소생한 일본은 우리에게 그 번영을 자랑하고 있고...
중립국 논의(당시 일부 진보적 지식층 사이에서 한반도 중립국론이
대두됐다)가 나오리만치...
현실은 난처하고 절박한 것입니다.
(중략) 이 회의에 참석하신 여러분은 임전하는 용사의 결의를 갖고
신정부의 계획을 편달, 추진해줄 것을 당부합니다"
장면 총리는 보다 직접적으로 민주당의 경제정책 방향을 제시했다.
"우리는 4월 혁명을 통해 오랫동안 잃었던 자유와 민주주의를 도로
찾았습니다.
(중략) 그러나 4월 혁명의 진정한 과업은 민생안정을 바탕으로 한 줄기찬
경제발전 없이는 그 실효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을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정부는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산업경제의 개발에 관한 종합적인 정책과 장기계획이
수립돼야 할 것입니다.
(중략) 우리 신정부가 수립후 4개월동안 해온 일이 국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자성합니다.
그러나 새해(61년)부터는 국토건설 사업 등을 갖고 실업과 민생문제에 적극
대응해 나갈 것입니다.
온 국민이 자조 자립과 국민개조의 정신을 갖고 총궐기할 수 있도록
여러분이 도와주십시오"
대통령과 총리의 호소가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안타까운 것은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의 대통령은 "호소"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민주당 정부의 경제발전 구상과 전략이 종합경제회의에서 어떻게 구체화
되는지는 다음에 살펴보자.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29일자 ).
민주당 정부는 "5개년 계획"을 수립할 정도로 경제에 열의를 보였다.
민주당 정부의 의욕은 60년 12월15일부터 5일간 계속된 "종합경제회의"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당시 산업개발위원회 소속이었던 나는 이 회의에 간사로 파견됐다.
이 색다른 이름의 회의는 당시 장면 정부가 의욕을 갖고 경제정책에 대한
각계 의견 수렴을 목적으로 조직한 일종의 공청회였다.
참가자는 윤보선 대통령, 장면 총리를 포함한 정부 고위 인사들부터
지방각지의 독농가까지 광범했다.
경제계 기술계 학계 언론계 인사 등 모두 2백여명이나 됐다.
당시 오피니언리더들이 모두 참가한 매머드급회의였다.
내가 이 회의를 특별히 소개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우선 나는 이 회의를 통해 나름대로 한국경제발전 구상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또 나중에 전경련 사무국을 책임지면서 벌였던 각종 사업의 아이디어들을
이 회의를 통해서 얻었다.
간사로서는 1주일에 불과한 역할이었지만 다양한 사람들을 접촉했다.
특히 백출하는 의견들은 나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다.
이를테면 전경련 사무국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설립한 "한국경제 기술조사
센터"(한국경제연구원 전신)의 착상은 이 회의의 산업구조개편 분과위원회
에서 얻었다.
당시 한국경제협의회 준비위원이었던 한 기업인은 이 협의회 창립
준비회의에서 제기된 내용이라며 이를 "건의서"에 포함시켜달라고 주장했다.
그는 "천우사 전택보 사장이 이미 자유당 정부 때부터 "보세가공"을 시작해
외화획득과 함께 많은 일자리를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당시 한국경제
협의회는 여러 차례 준비회의를 거쳐 취지문 정관 등을 이미 마련했고 61년
1월10일에 개최할 창립총회만 기다리는 상태였다)
그런데 보세가공이란 말의 뜻을 대부분이 알아듣지 못했다.
참석자들 대부분은 금시초문인 것 같았다.
보세가공뿐 아니라 지금은 일반화된 경제용어나 신개념들에 대해 오피니언
리더들도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그때 나는 사회각계, 특히 경제인과 여타 분야 인사들을 위한 의견교환의
장이 절실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전경련 사무국장이 되자마자 한국경제기술조사센터를 설립한 것이다.
내가 직접 쓴 설립취지문은 이렇게 돼있다.
"학계 기술계의 학문적인 예지와 경제인들의 경험이 혼연일체가 돼 한국형
발전전략을 안출함을 목표로 삼는다"
종합경제회의가 의미를 갖는 것은 5.16 군사정부가 초창기에는 이 회의건의
내용을 정책의 교본으로 삼다시피 했다는 점 때문이다.
하나만 예를 들자면 박정희 군사정부는 출범 2개월후 "경제기획원"을
신설하고 "신5개년 계획" 추진을 천명했다.
그런데 이 경제기획원은 바로 종합경제회의에서 제기된 것을 이름만 바꿔
빌려쓴 것이다.
종합경제회의 건의문에 담긴 내용은 이렇다.
"국무총리 직속에 경제계획원(가칭)을 둔다.
이 계획원은 국가의 재정 산업 통상 금융의 민주화를 이룩함으로써
한국경제의 균형과 경제성장에 기여할 것을 목표로 한다" 재정 산업 통상
금융의 "민주화"를 역설한 점이 특히 눈에 띈다.
지금 정부가 표방하고 있는 "민주 시장경제주의"를 연상케하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박정희 정부가 이 건의서에 "차용"한 정책은 "농어촌고리채 정리"
등 한 두가지가 아니다.
이는 나중에 다시 언급할 것이다.
나는 이 회의를 통해 민주당 정부 수뇌들의 정세 판단, 경제구상, 결의
등을 직접 접할 수 있었다.
여기에 자유당 시절의 3개년계획,민주당 때의 5개년계획 작성에 참여해
얻은 지식을 합쳐 내 나름의 경제발전 구상의 윤곽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면 종합경제회의의 결론이라 할 "경제발전을 위한 대정부 건의" 내용을
살펴보자.
이 회의에선 <>행정기구 <>재정금융 <>산업구조 <>공기업 <>국제수지
<>고용 및 생활수준 <>지방개발사업 등 7개 분과위원회로 나뉘어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
대통령과 총리도 참석해 민주당 정부의 경제정책을 설명했다.
윤보선 대통령의 인사말에선 비장함마저 느낄 수 있다.
"허탈상태에 있는 전국민에게 의욕과 희망, 그리고 분발을 촉구합니다.
패전에서 소생한 일본은 우리에게 그 번영을 자랑하고 있고...
중립국 논의(당시 일부 진보적 지식층 사이에서 한반도 중립국론이
대두됐다)가 나오리만치...
현실은 난처하고 절박한 것입니다.
(중략) 이 회의에 참석하신 여러분은 임전하는 용사의 결의를 갖고
신정부의 계획을 편달, 추진해줄 것을 당부합니다"
장면 총리는 보다 직접적으로 민주당의 경제정책 방향을 제시했다.
"우리는 4월 혁명을 통해 오랫동안 잃었던 자유와 민주주의를 도로
찾았습니다.
(중략) 그러나 4월 혁명의 진정한 과업은 민생안정을 바탕으로 한 줄기찬
경제발전 없이는 그 실효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을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정부는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산업경제의 개발에 관한 종합적인 정책과 장기계획이
수립돼야 할 것입니다.
(중략) 우리 신정부가 수립후 4개월동안 해온 일이 국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자성합니다.
그러나 새해(61년)부터는 국토건설 사업 등을 갖고 실업과 민생문제에 적극
대응해 나갈 것입니다.
온 국민이 자조 자립과 국민개조의 정신을 갖고 총궐기할 수 있도록
여러분이 도와주십시오"
대통령과 총리의 호소가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안타까운 것은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의 대통령은 "호소"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민주당 정부의 경제발전 구상과 전략이 종합경제회의에서 어떻게 구체화
되는지는 다음에 살펴보자.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2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