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극복한 '세계의 CEO'] (6) '크라이슬러 이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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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의 문턱까지 갔다가 세계3대 자동차 메이커로 부상한 크라이슬러.
이 회사의 성공담이야말로 금세기 최고의 기업회생 스토리로 꼽힌다.
크라이슬러는 최근 다임러 벤츠와 합병을 발표함으로써 세계를 다시한번
놀라게 했다.
이번 합병으로 연간 매출액(97년기준) 1천3백억달러, 종업원 42만1천명에
연구개발비만도 71억달러에 이르는 거대 기업이 탄생했다.
세계적 자동차 메이커인 도요타나 폴크스바겐보다는 앞선 규모다.
크라이슬러는 불과 10여년만에 밑바닥에서 정상의 자리에 오른 셈이다.
이런 크라이슬러의 성공드라마를 보면서 대부분 사람들은 리 아이아코카
전회장를 떠올린다.
물론 물에 빠진 크라이슬러를 건져 올린 사람이 아이아코카 전회장이라는데
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가사상태에 빠져 있는 크라이슬러에 인공호흡을 시켜주고 생명력을
다시 불어넣은 사람은 아이아코카의 뒤를 이어 크라이슬러를 맡은
로버트 이튼회장이다.
92년 이튼회장이 크라이슬러의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할 당시 회사
내부에서는 불만의 소리도 적지 않았다.
로버트 이튼은 63년 GM에 입사한 이후 34년간 자동차 산업에 몸담아 온
GM맨.
자동차 기술, 제조, 생산계획, 품질개선등 거치지 않은 분야가 거의 없을
정도의 자동차 전문가다.
그러나 이튼회장은 크라이슬러 직원들에게 엄연한 "외부인"이었다.
당시 크라이슬러는 파산지경에 이르렀던 80년대 악몽을 씻어버리고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외부인의 CEO취임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기업을 제대로 끌어가려면 그 기업의 위치나 역량에
대해 잘 아는 내부사람이 조종석을 맡아야 한다는 게 당시의 중론이었다.
그러나 이튼회장은 이런 우려를 말끔히 씻어냈다.
그는 우선 뚜렷한 비전을 제시했다.
크라이슬러를 순수 자동차 제조업으로 성공시킨다는 것이었다.
그가 취임할 당시 크라이슬러는 80년대 시작한 사업 다각화의 실패로
고전을 겪고 있었다.
방위산업체, 전자우주시스템, 렌터카등 여러 사업에 손을 댔지만 뚜렷한
전략이 없는 탓에 엄청난 손해만 봤다.
이튼회장은 실패를 거울삼아 크라이슬러가 추구하는 가치와 비전을
명확하게 재정립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의 결론은 "소비자들이 계속 찾는 자동차와 트럭을 만드는 일"에 모든
자원과 에너지를 집중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내세운 슬로건은 "소비자들이 구매 욕구를 느끼고, 운전을 즐길 수
있으며, 다음에도 크라이슬러 차를 사고 싶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독특하고 혁신적인 스타일과 기능, 최첨단 안전장치, 낮은
원가를 통해 소비자의 만족도를 높이는 게 중요하다고 그는 판단했다.
이튼회장이 비용절감과 품질개선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중요한 요인으로
본게 협력업체들과의 관계.
협력업체들이 책임감을 갖고 차량 개발과정에 참여할수 있도록 유도하는
일이었다.
그는 이를위해 차량개발 초기단계부터 협력업체들이 이사회에 참가하도록
했다.
또 협력업체들의 원가절감 프로그램인 SCORE(Supplier Cost Reduction
Efforts)를 통해 연간 12억달러의 비용을 줄였다.
품질개선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역시 공장 근로자들.
이튼회장은 이점에 착안, 강성인 노조들과도 기꺼이 손을 맞잡았다.
80년부터 미국자동차노조(UAW)와 공동으로 UAW-크라이슬러 품질 개선
파트너십을 구축한 것.
1천개의 소규모 팀으로 나눠 작업함으로써 팀워크, 혁신적인 아이디어등을
장려한 결과 96년 10억달러가량의 비용 절감과 품질 개선을 이뤘다.
또 상품개발과 제조 과정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기 위해 "가상제조시설"로
불리는 완전 자동화된 제품 프로세스 관리 시스템을 구축, 제품개발 시간을
단축시켰다.
이런 갖가지 노력의 결과 크라이슬러 개발비는 총 판매액의 3.7%로
경쟁사의 절반수준으로 떨어졌다.
차량 1대당 생산원가도 경쟁사인 포드나 GM보다 1천~1천5백달러 절감할
수 있었다.
판매마진은 대당 6.5%.
포드의 3.9%, GM의 3.8%보다 월등히 앞서있다.
이튼회장은 성격면에서 전임자인 아이아코카 전회장와 크게 달랐다.
아이아코카 전회장은 성질이 급하고 솔직한 반면 이튼회장은 매너 있고
비교적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의 신념은 종업원들을 자극하거나 교란시키지 않고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팀워크를 핵심 성공 요인으로 꼽았다.
그의 이러한 경영 방식은 크라이슬러 내부로 확산됐고 구성원들사이에는
조용하지만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튼회장은 열정, 속도, 성장을 기업의 모토로 삼았다.
좋은 차를 만들겠다는 열정을 종업원들에게 심어주고 속도를 통해 비용
절감과 추진력을 유지함으로써 성장을 이룩한다는 것이 그의 아이디어였다.
최근 크라이슬러는 벤츠와 합병, 또 한번의 대전환점을 맞았다.
양사 합병은 크라이슬러에 큰 기회다.
그렇다고 성공이 보장된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문화적 차이점등을 들어 양사 합병의 성공여부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80년대초까지도 생사조차 점칠수 없을 정도의 짙은 안개속에
싸여있던 크라이슬러가 벤츠와의 합병으로 세계 3대 자동차 메이커로
등극한 것은 세계 자동차산업 역사상 보기 드문 역전드라마다.
이 역전드라마의 주역은 바로 이튼회장이다.
크라이슬러가 패자부활전에서 화려하게 승리할수 있도록 이끈 일등공신이
이튼회장이라는 점에서 그는 분명 탁월한 경영자다.
< 조용준 AT커니 컨설턴트 seoulopinion@atkearney.com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10일자 ).
이 회사의 성공담이야말로 금세기 최고의 기업회생 스토리로 꼽힌다.
크라이슬러는 최근 다임러 벤츠와 합병을 발표함으로써 세계를 다시한번
놀라게 했다.
이번 합병으로 연간 매출액(97년기준) 1천3백억달러, 종업원 42만1천명에
연구개발비만도 71억달러에 이르는 거대 기업이 탄생했다.
세계적 자동차 메이커인 도요타나 폴크스바겐보다는 앞선 규모다.
크라이슬러는 불과 10여년만에 밑바닥에서 정상의 자리에 오른 셈이다.
이런 크라이슬러의 성공드라마를 보면서 대부분 사람들은 리 아이아코카
전회장를 떠올린다.
물론 물에 빠진 크라이슬러를 건져 올린 사람이 아이아코카 전회장이라는데
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가사상태에 빠져 있는 크라이슬러에 인공호흡을 시켜주고 생명력을
다시 불어넣은 사람은 아이아코카의 뒤를 이어 크라이슬러를 맡은
로버트 이튼회장이다.
92년 이튼회장이 크라이슬러의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할 당시 회사
내부에서는 불만의 소리도 적지 않았다.
로버트 이튼은 63년 GM에 입사한 이후 34년간 자동차 산업에 몸담아 온
GM맨.
자동차 기술, 제조, 생산계획, 품질개선등 거치지 않은 분야가 거의 없을
정도의 자동차 전문가다.
그러나 이튼회장은 크라이슬러 직원들에게 엄연한 "외부인"이었다.
당시 크라이슬러는 파산지경에 이르렀던 80년대 악몽을 씻어버리고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외부인의 CEO취임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기업을 제대로 끌어가려면 그 기업의 위치나 역량에
대해 잘 아는 내부사람이 조종석을 맡아야 한다는 게 당시의 중론이었다.
그러나 이튼회장은 이런 우려를 말끔히 씻어냈다.
그는 우선 뚜렷한 비전을 제시했다.
크라이슬러를 순수 자동차 제조업으로 성공시킨다는 것이었다.
그가 취임할 당시 크라이슬러는 80년대 시작한 사업 다각화의 실패로
고전을 겪고 있었다.
방위산업체, 전자우주시스템, 렌터카등 여러 사업에 손을 댔지만 뚜렷한
전략이 없는 탓에 엄청난 손해만 봤다.
이튼회장은 실패를 거울삼아 크라이슬러가 추구하는 가치와 비전을
명확하게 재정립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의 결론은 "소비자들이 계속 찾는 자동차와 트럭을 만드는 일"에 모든
자원과 에너지를 집중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내세운 슬로건은 "소비자들이 구매 욕구를 느끼고, 운전을 즐길 수
있으며, 다음에도 크라이슬러 차를 사고 싶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독특하고 혁신적인 스타일과 기능, 최첨단 안전장치, 낮은
원가를 통해 소비자의 만족도를 높이는 게 중요하다고 그는 판단했다.
이튼회장이 비용절감과 품질개선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중요한 요인으로
본게 협력업체들과의 관계.
협력업체들이 책임감을 갖고 차량 개발과정에 참여할수 있도록 유도하는
일이었다.
그는 이를위해 차량개발 초기단계부터 협력업체들이 이사회에 참가하도록
했다.
또 협력업체들의 원가절감 프로그램인 SCORE(Supplier Cost Reduction
Efforts)를 통해 연간 12억달러의 비용을 줄였다.
품질개선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역시 공장 근로자들.
이튼회장은 이점에 착안, 강성인 노조들과도 기꺼이 손을 맞잡았다.
80년부터 미국자동차노조(UAW)와 공동으로 UAW-크라이슬러 품질 개선
파트너십을 구축한 것.
1천개의 소규모 팀으로 나눠 작업함으로써 팀워크, 혁신적인 아이디어등을
장려한 결과 96년 10억달러가량의 비용 절감과 품질 개선을 이뤘다.
또 상품개발과 제조 과정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기 위해 "가상제조시설"로
불리는 완전 자동화된 제품 프로세스 관리 시스템을 구축, 제품개발 시간을
단축시켰다.
이런 갖가지 노력의 결과 크라이슬러 개발비는 총 판매액의 3.7%로
경쟁사의 절반수준으로 떨어졌다.
차량 1대당 생산원가도 경쟁사인 포드나 GM보다 1천~1천5백달러 절감할
수 있었다.
판매마진은 대당 6.5%.
포드의 3.9%, GM의 3.8%보다 월등히 앞서있다.
이튼회장은 성격면에서 전임자인 아이아코카 전회장와 크게 달랐다.
아이아코카 전회장은 성질이 급하고 솔직한 반면 이튼회장은 매너 있고
비교적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의 신념은 종업원들을 자극하거나 교란시키지 않고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팀워크를 핵심 성공 요인으로 꼽았다.
그의 이러한 경영 방식은 크라이슬러 내부로 확산됐고 구성원들사이에는
조용하지만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튼회장은 열정, 속도, 성장을 기업의 모토로 삼았다.
좋은 차를 만들겠다는 열정을 종업원들에게 심어주고 속도를 통해 비용
절감과 추진력을 유지함으로써 성장을 이룩한다는 것이 그의 아이디어였다.
최근 크라이슬러는 벤츠와 합병, 또 한번의 대전환점을 맞았다.
양사 합병은 크라이슬러에 큰 기회다.
그렇다고 성공이 보장된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문화적 차이점등을 들어 양사 합병의 성공여부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80년대초까지도 생사조차 점칠수 없을 정도의 짙은 안개속에
싸여있던 크라이슬러가 벤츠와의 합병으로 세계 3대 자동차 메이커로
등극한 것은 세계 자동차산업 역사상 보기 드문 역전드라마다.
이 역전드라마의 주역은 바로 이튼회장이다.
크라이슬러가 패자부활전에서 화려하게 승리할수 있도록 이끈 일등공신이
이튼회장이라는 점에서 그는 분명 탁월한 경영자다.
< 조용준 AT커니 컨설턴트 seoulopinion@atkearney.com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1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