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입삼 회고록 '시장경제와 기업가 정신'] (15)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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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당 시절의 인물들 ]
장면정부가 5개년계획 등 경제발전 청사진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대해
"허약한" 정권이 어떻게 이런 거창한 일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 의문은 내 얘기를 들어보면 차차 풀릴 것이다.
자유당 정권과 비교해 민주당 정부는 민간 경제계와 의견교환이 활발했다는
점이 큰 특징이다.
재계와 밀접했지만 "정경유착"과는 거리가 멀었다.
9개월의 단명으로 끝난 민주당 정권은 정권과 경제계가 유착할 겨를도
없었다.
예를 한 개만 들어보자.
5.16쿠데타 직후 군사정부는 장면 정부 주요 각료들을 감옥에 가뒀다.
이들은 기업인들과 사이가 좋았던 주요한 부흥.상공장관의 집을 샅샅이
뒤졌다.
뇌물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군인들이 찾아낸 것은 겨우 새 모자 하나였다.
이 모자가 혁명재판장에 "뇌물증거"로 제시됐다.
이 모자는 "국제회의에 모자 하나 없이 갈 수는 없지 않느냐"며 기업인
친구가 선물한 것이었다.
당시 엄격한 검열하에 있던 신문들이 가십기사로 다뤘을 정도로 유명한
얘기다.
민주당과 기업인들의 친밀한 관계는 이승만정부 말기로 소급된다.
부정부패가 판을 쳤던 시절이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판단한 야당 성향의 기업인들이 자연스럽게 모이기
시작했다.
광복 후 한민당의 돈줄이었던 경방과 삼양사를 중심으로 한 기업인들과
패기만만한 서북 출신 경제인들이 주류였다.
이들은 4.19 직후 한국경제협의회(전경련 전신) 설립모임 과정에서 차기
수권정당인 민주당 중진들과 자주 어울려 경제부흥책을 협의해왔다.
이들이 정계로도 진출하고 또 기업에서 활동하면서 경제발전책을 도모해온
것이다.
주요한 장관과 김영선 재무장관은 정계에 진출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주 장관은 30년대 중국 상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었다.
귀국 후엔 일본경찰에 불령선인(사상이 나쁜 위험한 조선인이란 뜻)으로
지목돼 형무소를 집 드나들듯했다.
이를 보다 못한 당시 화신백화점 박흥식 사장이 그에게 화신 서무과장
자리를 줬다.
주 장관은 이 회사에 들어가 기업경영과 경제운영 등 많은 것을 배웠다.
김 재무장관도 재계와 인연이 깊었다.
그는 주요한 장관과 함께 삼성 이병철 사장이 58년 설립한 한국경제재건
연구소에 참여했다.
삼성 이 사장은 삼화빌딩에 1백50평을 얻어 이 연구소를 만들었다.
"호암자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중지를 모으기 위해 이기붕 김영선 김유택 임문환 주요한 송방용 제씨를
위시하여 정치 경제 학계의 중진들이 거의 빠짐없이 여기에 참여하여 한국
경제의 앞날을 놓고 서로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었다"
이미 종합경제회의를 통해 내가 소개했던 김 장관의 자립경제 청사진은
이런 과정을 거쳐 형성됐던 것이다.
특히 그는 수출입링크 구상을 공식적으로 처음 내놓은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수출입링크제는 64년에 마련돼 수출진흥정책에 뚜렷한 영향을 준 정책이다.
김 장관은 전택보 천우사사장 박흥식 화신사장 등이 내놓은 이 구상을
정책화했다.
그 기록은 김 장관이 파이스턴이코노믹리뷰지와 인터뷰한 내용(60년10월27일
자)에 잘 나타나 있다.
민주당 정부는 이처럼 경제인들이 직접 참여하거나 뒤에서 지원함으로써
경제의 중요성을 알았고 그에 따라 5개년 계획도 만들 수 있었다.
이때부터 한국에서도 "기업가 정신"이 생겨났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민주당에서 꽃피우기 시작한 한국 기업가정신의 맥을 두 사람에게서
찾고 있다.
강원산업의 정인욱씨와 천우사의 전택보씨가 그들이다.
강원산업의 정인욱 명예회장이 태백산종합개발구상을 미군정하의 상무부에
제안한 것이 47년 이른 봄이었다.
그는 해방후 미군정의 촉탁직을 맡아 일하고 있었다.
그가 제안한 것은 태백산 일대 정선 삼척 강릉을 연결하는 삼각지대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이곳은 우리나라 4대 지하자원인 석탄 철 흑연 금 등을 비롯 수백종의
광물이 매장된 곳이다.
우선 석탄(무연탄)을 개발해 발전을 하고 이를 에너지로 산업부흥에 시동을
건다는 원대한 구상이었다.
이를 위해 석탄을 운반할 철도를 부설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재원은 미군정의 양곡지원자금으로 충당하고 몇백만명의 실업자를 동원해
철도와 도로를 부설하자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그의 구상을 일소에 붙였다.
정인욱씨는 사표를 던지고 혼자 꿈을 키웠다.
이때 그 구상을 이해하고 찬성한 것은 미군정 경제협력처(ECA)의 크라우스
고문 한 사람뿐이었다.
정씨의 구상은 민주당 시절 태백산종합개발계획으로 구체화되고 박정희
정권에 가서야 결실을 맺게 된다.
천우사 전택보 사장은 보세가공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전택보씨는 48년 오징어대금을 받으러 중국에 갔다가 홍콩에 들르게 됐다.
홍콩은 내란을 피해 중국본토에서 몰려온 수백만명의 피란민들로
북적거렸지만 활기가 넘쳤다.
"물까지 수입해 먹는다는 홍콩이 어떻게 우리나라보다 잘사는 것일까"하는
의문을 품었다.
그는 홍콩사람들이 원자재를 수입해 다시 가공, 수출해 먹고 살고 있는
것을 눈으로 봤다.
우리나라를 세계 제일의 보세가공국으로 만들 수 있고 이것으로 경제도
부흥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돌아왔다.
전 사장은 5.16후 박정희에게 수출주도 발전전략을 가르쳤다.
그리고 첫번째 "수출왕"이 됐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13일자 ).
장면정부가 5개년계획 등 경제발전 청사진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대해
"허약한" 정권이 어떻게 이런 거창한 일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 의문은 내 얘기를 들어보면 차차 풀릴 것이다.
자유당 정권과 비교해 민주당 정부는 민간 경제계와 의견교환이 활발했다는
점이 큰 특징이다.
재계와 밀접했지만 "정경유착"과는 거리가 멀었다.
9개월의 단명으로 끝난 민주당 정권은 정권과 경제계가 유착할 겨를도
없었다.
예를 한 개만 들어보자.
5.16쿠데타 직후 군사정부는 장면 정부 주요 각료들을 감옥에 가뒀다.
이들은 기업인들과 사이가 좋았던 주요한 부흥.상공장관의 집을 샅샅이
뒤졌다.
뇌물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군인들이 찾아낸 것은 겨우 새 모자 하나였다.
이 모자가 혁명재판장에 "뇌물증거"로 제시됐다.
이 모자는 "국제회의에 모자 하나 없이 갈 수는 없지 않느냐"며 기업인
친구가 선물한 것이었다.
당시 엄격한 검열하에 있던 신문들이 가십기사로 다뤘을 정도로 유명한
얘기다.
민주당과 기업인들의 친밀한 관계는 이승만정부 말기로 소급된다.
부정부패가 판을 쳤던 시절이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판단한 야당 성향의 기업인들이 자연스럽게 모이기
시작했다.
광복 후 한민당의 돈줄이었던 경방과 삼양사를 중심으로 한 기업인들과
패기만만한 서북 출신 경제인들이 주류였다.
이들은 4.19 직후 한국경제협의회(전경련 전신) 설립모임 과정에서 차기
수권정당인 민주당 중진들과 자주 어울려 경제부흥책을 협의해왔다.
이들이 정계로도 진출하고 또 기업에서 활동하면서 경제발전책을 도모해온
것이다.
주요한 장관과 김영선 재무장관은 정계에 진출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주 장관은 30년대 중국 상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었다.
귀국 후엔 일본경찰에 불령선인(사상이 나쁜 위험한 조선인이란 뜻)으로
지목돼 형무소를 집 드나들듯했다.
이를 보다 못한 당시 화신백화점 박흥식 사장이 그에게 화신 서무과장
자리를 줬다.
주 장관은 이 회사에 들어가 기업경영과 경제운영 등 많은 것을 배웠다.
김 재무장관도 재계와 인연이 깊었다.
그는 주요한 장관과 함께 삼성 이병철 사장이 58년 설립한 한국경제재건
연구소에 참여했다.
삼성 이 사장은 삼화빌딩에 1백50평을 얻어 이 연구소를 만들었다.
"호암자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중지를 모으기 위해 이기붕 김영선 김유택 임문환 주요한 송방용 제씨를
위시하여 정치 경제 학계의 중진들이 거의 빠짐없이 여기에 참여하여 한국
경제의 앞날을 놓고 서로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었다"
이미 종합경제회의를 통해 내가 소개했던 김 장관의 자립경제 청사진은
이런 과정을 거쳐 형성됐던 것이다.
특히 그는 수출입링크 구상을 공식적으로 처음 내놓은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수출입링크제는 64년에 마련돼 수출진흥정책에 뚜렷한 영향을 준 정책이다.
김 장관은 전택보 천우사사장 박흥식 화신사장 등이 내놓은 이 구상을
정책화했다.
그 기록은 김 장관이 파이스턴이코노믹리뷰지와 인터뷰한 내용(60년10월27일
자)에 잘 나타나 있다.
민주당 정부는 이처럼 경제인들이 직접 참여하거나 뒤에서 지원함으로써
경제의 중요성을 알았고 그에 따라 5개년 계획도 만들 수 있었다.
이때부터 한국에서도 "기업가 정신"이 생겨났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민주당에서 꽃피우기 시작한 한국 기업가정신의 맥을 두 사람에게서
찾고 있다.
강원산업의 정인욱씨와 천우사의 전택보씨가 그들이다.
강원산업의 정인욱 명예회장이 태백산종합개발구상을 미군정하의 상무부에
제안한 것이 47년 이른 봄이었다.
그는 해방후 미군정의 촉탁직을 맡아 일하고 있었다.
그가 제안한 것은 태백산 일대 정선 삼척 강릉을 연결하는 삼각지대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이곳은 우리나라 4대 지하자원인 석탄 철 흑연 금 등을 비롯 수백종의
광물이 매장된 곳이다.
우선 석탄(무연탄)을 개발해 발전을 하고 이를 에너지로 산업부흥에 시동을
건다는 원대한 구상이었다.
이를 위해 석탄을 운반할 철도를 부설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재원은 미군정의 양곡지원자금으로 충당하고 몇백만명의 실업자를 동원해
철도와 도로를 부설하자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그의 구상을 일소에 붙였다.
정인욱씨는 사표를 던지고 혼자 꿈을 키웠다.
이때 그 구상을 이해하고 찬성한 것은 미군정 경제협력처(ECA)의 크라우스
고문 한 사람뿐이었다.
정씨의 구상은 민주당 시절 태백산종합개발계획으로 구체화되고 박정희
정권에 가서야 결실을 맺게 된다.
천우사 전택보 사장은 보세가공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전택보씨는 48년 오징어대금을 받으러 중국에 갔다가 홍콩에 들르게 됐다.
홍콩은 내란을 피해 중국본토에서 몰려온 수백만명의 피란민들로
북적거렸지만 활기가 넘쳤다.
"물까지 수입해 먹는다는 홍콩이 어떻게 우리나라보다 잘사는 것일까"하는
의문을 품었다.
그는 홍콩사람들이 원자재를 수입해 다시 가공, 수출해 먹고 살고 있는
것을 눈으로 봤다.
우리나라를 세계 제일의 보세가공국으로 만들 수 있고 이것으로 경제도
부흥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돌아왔다.
전 사장은 5.16후 박정희에게 수출주도 발전전략을 가르쳤다.
그리고 첫번째 "수출왕"이 됐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1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