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전 태국 바트화 폭락에서 비롯된 아시아각국의 통화위기는 1백년전
식민지 개척에 나섰던 서양의 함선들처럼 여기저기 출몰하는 선진국의
핫머니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19세기 후반 서구 열강들은 공산품의 시장개척과 원료 확보를 위해 군함대의
호위속에 교역선을 파견, 그들의 시장을 넓혀 나갔다.

20세기말 이들은 다시 집중된 대규모 투자자금을 신속한 시장의 정보에 따라
여기저기 이동시키면서 아시아 각국의 통화를 위협하고 경제의 취약점을
노출시켜 그 구조조정과정에서 그들의 경제질서에 복속시키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가설의 진위를 따지기 전에 작금 아시아 각국이 겪고 있는 경제난은
문명의 격변기에 그 핵심에서 벗어난 주변지역이 겪는 전환기적인
어려움이라는 점에서 19세기말의 현상과 너무나 유사하다.

서세동점의 물결은 19세기 후반 극동에까지 밀려와 비슷한 시기에 한.일
두나라는 이런 변화의 물결에 휩싸여 있었다.

당시 외부세계의 변화를 예견한 일본은 재빨리 정치체제와 제도를 개혁하여
산업사회를 대비하기 위한 새로운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서양을 따라잡고 뛰어 넘자는 국시로 국론을 통일하고 그들은 부국강병책을
추진하였다.

같은 시기 우리해안에도 외국상선이 출몰하여 시대의 변화를 알려왔음에도
아랑곳없이 눈앞의 세력다툼에 여념이 없었던 우리의 조야는 오히려 1866년과
1871년 두차례에 걸쳐 프랑스와 미국 군함이 침입하여 소요를 일으키고
철수한 것을 서세에 대한 승리로 자만하고 의기양양하여 쇄국과 척화의 벽을
높이 쌓고 산업사회의 도래를 외면한채 기존질서의 틀속에서 안주하였다.

그 결과 1876년 오히려 일본의 무력앞에 강제로 나라를 열어 개항하는
수모를 당하였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말처럼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총체적 어려움도
변화하는 환경과 그 질서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잘못에서 비롯된다.

2차대전후 세계경제의 확장기에 후발국의 이점을 활용하여 우리는 압축
성장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70년대 후반기부터 저성장기에 접어든 세계경제의 흐름은 정보통신
기술의 보급과 함께 자유화를 통한 시장통합과 세계화라는 방향으로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이런 변화를 예견하지 못한채 외형적 성장에 안주해왔던 아시아 각국의
경제는 점차 발전의 한계를 드러냈고 급기야는 국제투자가들의 외면으로
신용의 위험앞에 노출되기에 이르렀다.

차입에 의존해온 외형적 확대경영이 신용위험에 부딪치면 그것은 곧 실물
부문의 구조상의 문제로 연결되어 경제의 위축과 이에따른 심대한 후유증을
불가피하게 한다.

국가경제가 국제통화기금(IMF)의 관리하에 부도를 가까스로 면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이 문제의 밑바탕에 흐르는 질서변화의 심각성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기존질서의 연장선상에서 임기응변의 대응에
머물고 있다.

체제와 제도개혁에 앞장서야 할 정치계는 당리당략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오랜 정부지원에 의존해온 경제계는 속수무책으로 무력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시장의 유연성을 실현시켜야 할 절박한 현실속에서도 노동계는 지난날의
책임을 따져 이를 외면하고 있고, 개혁에 대한 설득력있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정부는 하루하루 일어나는 문제를 감당하는데 벅차다.

변화와 개혁이 때를 잃으면 지난날 산업화시대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여
우리가 겪었던 질곡을 되풀이 할 우려가 있다.

따라서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국민 모두가 당면한 난국을 극복하기 위하여는
제도와 관행에 일대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여 능동적인 협력을
이끌어내야 한다.

기존의 제도와 시스템을 그대로 두고 그동안 누적된 부실과 부작용을 제거
하고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전개될 무한경쟁의 세계화된 시장에서
주도적으로 융합할 수 있는 능률적이고 경쟁적인 새로운 제도와 관행을
정립하는데 개혁의 목표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고통과 부작용을
감내하고서라도 일관성있게 추진하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

이런 비전을 바탕으로 국민 모두가 과거를 되돌아보기보다 미래지향적인
개혁에 동참하도록 정부는 국론을 하나로 모아 나가야 한다.

정치는 눈앞의 권력다툼을 지양하고 국난의 실상을 직시하여 새로운 체제와
제도를 만드는데 앞장서야 한다.

그리고 경제계는 이럴수록 불굴의 의지로 모든 사람들의 경제의욕에 불을
댕기는 참된 기업가 정신을 발휘하여야 한다.

사회각계의 지도자들도 나라의 어려움에 적극적으로 나서 올바른 말로
국민을 설득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여기에서 지금 구체화되고 있는 금융구조의 개편이나 산업구조조정도 각
부문에 누적된 부실을 정리한다는 차원을 넘어 개방되고 세계화된 시장에서
신뢰받는 건전하고 경쟁력있는 금융기관과 시스템을 확립하고 같은 수준의
기업구조를 정립하려는 원칙을 흔들림없이 밀고 나가야 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1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