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백산종합개발구상 ]]

정인욱 강원산업명예회장은 왜 "미친 사람"소리까지 들어가면서 태백산에
매달렸을까.

그의 젊은 시절까지 올라가야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는 1912년 황해도의 3만석 대부호 집에서 태어났다.

일본 와세다대학에 진학하면서 전공으로 채광야금학과를 택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엄친의 영향을 받았던 그는 이상촌 건설이나
계몽문고 출판 등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중간에 철학과로 전과도 했다.

채광야금학과에서 그는 영국의 산업혁명을 비롯 프랑스 독일 등의
산업발전이 석탄산업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됐다.

정인욱은 졸업후에 조선총독부 광산국 촉탁으로 근무했다.

그는 거기서 일본이 태백산을 탐내고 있다는 걸 감지할 수 있었다.

일본인들은 한국을 대륙침략 전진기지로 만들기 위해 태백산 중심의
석탄개발을 추진하고 있었다.

태백산은 자원의 보고였다.

무연탄은 남한매장량 6억2천만t의 88%가 묻혀 있었다.

철광석도 총매장량 2천만t 가운데 44%가 태백산에 있었다.

47년 미군정 상무부에 건의한 자신의 태백산개발구상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정인욱은 사표를 던졌다.

그러나 정인욱은 자신의 구상을 인정했던 크라우스 고문의 주선으로
미국시찰을 떠나게 된다.

귀국 길에 그는 도쿄에 들렀다.

도쿄역 인근에 붙어있던 플래카드를 보고 그는 감전된 양 멈춰섰다.

거기엔 "일본경제부흥은 석탄개발로"라고 적혀 있었다.

자신의 구상은 비웃음을 샀지만 일본인들의 구상은 이미 운동화되고 있음을
본 그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당시 일본도 패전직후라 식량을 미군의 구호양곡으로 근근이 꾸려가고
있었다.

석탄개발은 엄두도 내지 못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미국은 일본을 "동양의 스위스-농업국"으로 만들겠다는 전후처리
구상을 갖고 있었다.

일본의 경제전문가들은 그러나 가만히 앉아있지 않았다.

식량원조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새로운 구상을 추진했다.

그들은 당시 요시다총리에게 중유 2만t을 맥아더 사령관에게 긴급 요청할
것을 건의했다.

이 중유로 고철을 녹여 철을 만들고 이 철을 다시 석탄채굴과 운반철로
제작에 사용할 계획이었다(이같이 석탄에 집중한 것을 당시 일본경제학자들은
경사생산이라고 불렀다).

중유 2만t을 미군으로부터 받은 것이 1947년 봄.

정인욱이 태백산 석탄개발을 위해 "제천-영월" 철도부설을 제안한 것과
같은 무렵이었다.

경제 재건의 기폭제로서 석탄개발을 착상한 것은 한국과 일본이 같은
시기였지만 결과는 너무나 판이했다.

53년 7월 휴전이 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경제부흥책에 목말라했다.

이때에 와서야 석탄개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수십만 피란민들의 겨울난방이 큰 문제로 대두된 탓도 있었다.

54년 12월 이 대통령은 대한석탄공사에 군대를 파견해 철도부설, 보수작업을
벌이게 했다.

석탄수송에 군트럭을 투입할 것을 직접 지시했다.

정인욱은 이때 태백산에 있었다.

그는 50년초 석공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고 생산이사라는 중책까지
맡았지만 갖가지 모략과 숨막히는 관료조직행태에 견디지 못해 물러났다.

그는 폐광이 되다시피한 강원탄광을 불하받아 광부들과 합숙하면서
탄광재건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나중에 교통 상공 내무장관 등 자유당 정부 요직을 거치게 된 김일환 장군을
만난 것이 이때다.

김 중장은 당시 이 대통령의 특명을 받아 연암선(춘양~동점, 백산~태백)
부설공사 감독으로 태백산에 내려왔었다.

김 중장은 마땅한 숙소가 없어 정인욱이 묵고 있던 여관방에서 침식을
같이했다.

그는 정인욱의 경영철학과 청렴함에 큰 감명을 받았다.

정인욱이 57년 석공총재가 된 것은 김 장군이 그를 이 대통령에게 강력히
천거한 탓이다.

정인욱은 석공 총재 제의를 받고 처음엔 고사했다.

이 대통령이 고집을 굽히지 않자 그는 자유당이 받아줄 수 없는 세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석공운영을 총재에게 전적으로 일임할 것, 둘째 인사청탁을 절대하지
말 것, 셋째 석탄대금은 인도 즉시 지급토록 할 것 등이었다.

그러나 뜻밖에 이 대통령은 이 세가지 조건을 다 받아들였다.

정인욱은 석공총재로 취임하자 "원칙경영"을 선언했다.

원칙과 합리성에 위배되면 어떤 외압이라도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그리고 노조위원장에겐 체불임금 6개월치를 일시에 해결하겠다면서 협조를
당부했다.

특히 외부 인사청탁은 절대 받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광부들의 사기와 의욕은 크게 높아졌다.

59년말까지 석탄생산은 매년 50% 이상 증가했다.

그리고 자체적으로 수직갱 굴착을 준비할 정도로 기술력도 높아졌다.

그러나 태백산종합개발 구상을 펴보지 못한채 그는 석공을 떠나야 했다.

59년 12월이 되자 자유당은 3개월 앞으로 다가온 정.부통령 선거준비에
혈안이 됐다.

석공에도 인사압력이 쏟아져들어왔다.

자유당 사람들을 위해 자리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정인욱은 주저없이 사표를 던졌다.

정인욱의 태백산종합개발구상은 민주당 정부에 와서야 제대로 평가받았고
5.16쿠데타 후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 실현됐다.

60~70년대 경제 전문가들 가운데는 정인욱의 구상이 조금만 일찍
구체화됐다면 "한강의 기적"이 아니라 "정선의 기적"이 50년대에 이미
이뤄졌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던 사람이 적지 않았다.

여기서 태백산종합개발구상의 또 다른 의미 하나를 꼭 짚어야겠다.

박정희 정권 때 소위 부정축재자로 몰린 기업인들은 벌과금으로 공장을
지어 대납했다.

이 "기업 분담론"은 60년 당시 한국경제협의회(전경련 전신)를 만든
기업인들이 태백산종합개발의 구체적 실천책으로 만든 방안이었다.

태백산을 관통하는 철도부설을 구간별로 나누어 대기업들이 책임지자는
것이었다.

형식이야 어쨌든 기업인들이 경제발전 초기에 주도적 역할을 하게된 구도가
이때 이미 만들어진 것이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2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