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를 되살리는 처방전에는 기업의 구조조정이라는 항목이 들어 있다.

방만한 경영체계를 정비해 "전문화"하라는 주문이다.

여기엔 대기업집단이 경제난의 주범이라는 등식이 깔려 있다.

하지만 하바드비즈니스스쿨의 크리쉬나 팔레프교수와 타룬 칸나 조교수는
이머징 마켓의 경우 전문화만이 최선의 선택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21일 본사를 방문한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기고했다.

< 정리=조주현 기자 forest@ >

-----------------------------------------------------------------------

서방기업들은 "핵심 경쟁력"과 "전문화"라는 단어를 바이블처럼 떠받든다.

지난 60년대와 70년대에 그룹형태의 회사조직이 유행했으나 대부분 해체
됐다.

하지만 "이머징 마켓"이라고 불리는 국가들에서는 여전히 많은 계열사를
거느린 대기업집단들이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컨설턴트들은 경제에 국경이 없어지면서 이머징 마켓의 대기업집단들에게
사업범위를 줄여 전문화하고 특정한 사업분야에 힘을 집중시키라고 촉구하고
있다.

공룡과 같은 거대한 조직으로는 요즘과 같이 빨리 변하는 시대에 대응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같은 논리는 중요한 점을 간과하는 것이다.

이머징 마켓과 선진국은 경영환경이 판이하게 다르다.

선진국은 금융시장 노동력 등 경영인프라가 탄탄하다.

반면 이머징 마켓은 그렇지 못하다.

따라서 이머징 마켓에선 부족한 경영인프라를 기업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

여러가지 사업을 벌이는 대기업집단이 훨씬 유리하다는 말이다.

계열사를 활용해 부족한 인프라를 메울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화된 기업은 오히려 이머징 마켓에서는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이 상대적
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몇가지 사례를 보자.

상품시장의 경우 이머징 마켓에서는 판매자나 구매자 모두 정보가 부족한게
사실이다.

통신수단이 부족하기 때문에 정보전달이 늦을 수 밖에 없다.

설사 제품을 판다고 해도 소비자단체등의 활동이 취약해서 고객들의 불만이
쉽게 전달되지 않는다.

새로 시장에 진입한 업체는 신뢰성 있는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애를
먹기 마련이다.

하지만 널리 알려져 있는 대기업집단의 경우엔 사정이 다르다.

이미 굳혀져 있는 이미지를 이용해 시장에 뛰어들수 있기 때문에 생소한
사업을 벌이더라도 좋은 실적을 낼 수 있다.

한쪽 사업에서 부진하더라도 다른 쪽에서 보충해 주기 때문에 브랜드
이미지에 타격을 받는 살케가 많지 않다.

금융시장도 마찬가지다.

이머징 마켓에선 투자가들은 정보가 없어 돈을 어디에 투자해야 할지
알기가 어렵다.

미국의 금융시장에선 적절한 정보를 바탕으로 자유롭게 돈을 넣고 빼지만
이머징 마켓은 그렇지 않다.

정보도 없고 안전장치도 미비하다.

조직이 잘 갖춰진 큰 기업들외에는 믿을 곳이 별로 없다.

기업의 규모가 크고 사업분야가 다양한 경우에는 숙련된 인력을 확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개발도상국에서는 비즈니스 스쿨등이 활성화되지 못해 능력있는 경영자나
숙련된 노동자가 적게 마련이다.

하지만 큰 회사들은 인재를 스스로 육성할 수 있다.

대기업집단들은 또한 노동시장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이머징 마켓의 특징중 하나는 종업원을 해고시키는게 까다롭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기업집단들은 자체적으로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다.

만일 한 기업의 사업전망이 어두워지면 종업원들을 그룹내의 다른 회사로
보내면 된다.

정부와의 관계에서도 대기업집단들이 유리하다.

일반적으로 이머징 마켓은 각종 규제가 많다.

관리들은 기업활동에 심하게 간여한다.

이머징 마켓의 경우 대부분 정부와 대기업집단이 깊은 협력관계를 맞고
있다.

한국에서는 기업과 정부가 함께 국가경제를 운용해 온게 사실이다.

따라서 정부와 매끄러운 관계를 맺고 있는 대기업집단들이 전문화된 기업
보다는 편안한 사업환경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대기업집단은 여러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신뢰도가 높다.

계열사중 한 회사의 신뢰도가 무너지면 집단 전체가 곤란을 겪게 된다.

개발도상국의 경우에 성공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은 외국의 기술과
정보를 어떻게 확보하느냐 인데, 대기업그룹은 신뢰도가 높기 때문에 상대적
으로 유리하다.

특히 법의 보호가 미약한 이머징 마켓에서 신뢰성은 성공을 담보하는
요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덩치가 크다고 자동적으로 우월해지는 것은 아니다.

규모의 잇점을 활용하기 위한 적극적인 경영이 뒷받침돼야 한다.

인도나 한국기업들중 아주 큰 대기업집단외에는 대부분 규모의 장점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룹 경영진들은 거대하고 복잡한 조직을 운영하는데 드는 비용을 보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데 항상 힘을 쏟아야 한다.

만일 잘 알려진 브랜드로 재미를 보고 있다면 다시 다른 제품을 내놓아
매츨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자금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면 다른 계열사를 도와줄 수 있는 길도
개척해야 한다.

이머징 마켓에서 대기업그룹이 유리하다고 해서 모든 그룹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부족한 경영인프라를 모두 스스로 해결할 수도 없다.

성공하느냐 여부는 경영진의 몫이다.

부패하기 쉬운 조직이기 때문에 강력한 감사기능이 필요하며 재정관리도
엄격하게 해야 한다.

요즘들어서 서방의 컨설턴트나 파트너들은 대기업그룹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이머징 마켓에서 성공을 했다하더라도 여전히 "전문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이익을 얼마나 냈느냐 보다는 기업경영이 얼마나 투명한가에 관심을
쏟고 있다.

사실 대부분의 대기업그룹들이 경영구조가 복잡하기 때문에 어떤 사업이
잘 되는지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들은 또 그룹의 경영진들이 돈을 빼돌리는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대기업그룹들은 투자가들에 대해 그룹의 전략을 분명하게 이해
시키는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룹 경영자들은 투명성을 높이고 투자가들과 직접 대화하는 것을 생활화
해야 한다.

만일 대기업집단들이 그룹경영의 이같은 장점을 실리지 못한다면 서방의
요구대로 전문화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머징 마켓에서 이것은 최선이 아니다.

왜냐하면 경쟁업체들은 서방의 선진업체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첨단기술을 갖고 있고 싼값에 돈을 빌릴 수 있다.

또 발달된 경영노하우를 축적해 놓고 있다.

전문화한다고 해도 경쟁이 안된다는 얘기다.

따라서 서방의 선진업체에 대항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대기업집단이라는
외형속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높여가는 적극적인 경영전략을 구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2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