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다음과 같은 시 한편을 쓰면서 지금 우리의 간고함을 스스로
달래고 몸을 추스른 적이 있다.


얼마라던가 그 정확한 단위는 잊었지만 아무튼 몇만톤, 그런 정도의
어마어마한 힘! 이른 봄 언 땅 밀고 나오는 여린 새싹 한 잎의 힘을 그
초록힘을 수치로 산출해 보면 그렇다고 했다.

우리 여자들이 밀물 썰물로 제 몸속에 가두고 있는 바다, 애기를 낳는 힘,
그 절대 순간의 힘, 그것과 똑같다고 했다//

오늘 아침 산책길에서 풀밭에서 그 초록힘들의 무리를, 낳는 힘들을 보았다.

뾰족뾰족 땅을 들추고들 있었다.

- 우리나라엔 풀밭이 많다

그렇다.

우리나라엔 아직 이같은 무성의 푸른 풀밭들이 많다.

어디 이뿐인가.

또 얼마전엔 아기에게 그 좋다는 모유를 먹이고 있는 한 젊은 엄마가
아기가 배가 고플때쯤이면 그의 젖이 찌르르 신호를 보낸다고 부끄럽게
고백하는 걸 직접들은 적이 있다.

이 절대적 생체 교감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사랑이 아니겠는가.

이를 수치로 계산해 낸다면 또 얼마가 될까.

어마어마한 힘이 될 것이다.

또 있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자식이 보고 싶으면 그 그리움을 "요즈음엔 그 아이가
자꾸 눈에 밟힌다"는 기가 막힌 말로 나타냈다.

몸과 마음이, 그리움이란 추상적 심리가 몸이라는 실체로 하나가 되어
동시 표출되고 있는 이 말이야말로 진짜 언어가 아니겠는가.

로고스니 파토스니 운운하는 서양식 언어철학은 이 앞에서 한낱 가공의
논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따위의 데카르트식 형이상학도 낯을 붉힐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나는 우리 어머니들식 페미니즘을 절대적으로 신봉한다.

"박세리"의 힘도, 바로 어제 "한컴(한글과 컴퓨터)"과 "한글" 지키기본부가
마이크로소프트사로부터 우리 "한글"을 지켜낸 것도 이같은 힘의 집합의
결과였다고 믿는다.

그렇다.

우리나라엔 아직 모성의 풀밭이 많다.

우리식 페미니즘은 지금 우리들의 가장 튼튼한 보루가 될 수 있다.

아무이상이 없는데도 제왕절개로 애를 낳는 여자들이 자꾸만 늘어간다는
소식이 없지도 않지만, 아니 세계 1위라고 하지만.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2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