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정부청사 시대] 85년 첫 입안..'청사 대전이전 소사'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대전청사 이전계획은 지난 85년 전두환대통령이 "중앙행정기관및 외청배치
계획안"을 재가하면서 본격화됐다.
대전이 선정된 데는 교통의 요지이자 중부지역을 발전시키기에는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는 점이 감안됐다.
계획안은 당시 총리실에서 입안했다.
초안은 청 단위 기관 전부를 대전에 이전시키는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오늘날 원안의 90%이상이 그대로 이행됐을 정도로 구체적이고 타당성을
갖춘 초안으로 평가되고있다.
그러나 초반 5년가량은 부처간 이기주의 등으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렇다
할 진전을 보지 못했다.
정권을 이어받은 노태우대통령은 지지부진하던 대전청사이전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노대통령은 89년 2월 10일 대전을 방문한 자리에서 "제2수도로 집중육성해
나가겠다"고 공식 발표, 청사이전작업을 구체화시킨다.
노대통령은 이를 위해 그 다음날 곧바로 "수도권대책 실무기획단"을
발족시킨다.
단장에는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 부단장은 국무총리실 제2행정조정관을
각각 임명했다.
하지만 두달후 노대통령은 총리실에서 전담하기에는 부처간이기주의를
극복하기 힘들다고 판단, 명칭을 "지역균형발전기획단"으로 변경하면서
대통령비서실 소속으로 격상시킨다.
당시 기획단장은 문희갑 경제수석비서관, 부단장은 이석채 경제비서관
이었다.
그 이듬해인 90년 9월 노대통령이 마침내 11개 청단위기관의 대전이전에
관한 계획안을 최종 재가하면서 대전이전안은 현실화된다.
대전청사 건물은 김영삼 대통령 집권기인 93년 9월에 착공, 97년에 완공
됐다.
85년 전대통령이 서두를 꺼낸 이후 노,김대통령을 거치면서 13년만에
결론이 난 대역사인 셈이다.
< 류성 기자 sta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23일자 ).
계획안"을 재가하면서 본격화됐다.
대전이 선정된 데는 교통의 요지이자 중부지역을 발전시키기에는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는 점이 감안됐다.
계획안은 당시 총리실에서 입안했다.
초안은 청 단위 기관 전부를 대전에 이전시키는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오늘날 원안의 90%이상이 그대로 이행됐을 정도로 구체적이고 타당성을
갖춘 초안으로 평가되고있다.
그러나 초반 5년가량은 부처간 이기주의 등으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렇다
할 진전을 보지 못했다.
정권을 이어받은 노태우대통령은 지지부진하던 대전청사이전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노대통령은 89년 2월 10일 대전을 방문한 자리에서 "제2수도로 집중육성해
나가겠다"고 공식 발표, 청사이전작업을 구체화시킨다.
노대통령은 이를 위해 그 다음날 곧바로 "수도권대책 실무기획단"을
발족시킨다.
단장에는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 부단장은 국무총리실 제2행정조정관을
각각 임명했다.
하지만 두달후 노대통령은 총리실에서 전담하기에는 부처간이기주의를
극복하기 힘들다고 판단, 명칭을 "지역균형발전기획단"으로 변경하면서
대통령비서실 소속으로 격상시킨다.
당시 기획단장은 문희갑 경제수석비서관, 부단장은 이석채 경제비서관
이었다.
그 이듬해인 90년 9월 노대통령이 마침내 11개 청단위기관의 대전이전에
관한 계획안을 최종 재가하면서 대전이전안은 현실화된다.
대전청사 건물은 김영삼 대통령 집권기인 93년 9월에 착공, 97년에 완공
됐다.
85년 전대통령이 서두를 꺼낸 이후 노,김대통령을 거치면서 13년만에
결론이 난 대역사인 셈이다.
< 류성 기자 sta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2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