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당시절의 외자유치 ]

61년 4월말.

"4월 위기설" "쿠데타설" 등은 모두 설로 끝났다.

장면 정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는 본격적인 경제개발을 하게 된 것이다.

이미 국토건설단은 3월1일 3천명의 대원들이 보무 당당한 시가행진을 하면서
국민의 기대 속에 출범했다.

"번영의 경쟁"으로 이북을 따라잡기 위해 5개년계획이라는 청사진을 마련해
내놓았다.

남은 것은 제때에 재원을 조달해 일로 매진하는 것뿐이었다.

이해 1월 창립 당시부터 경제건설의 주역을 자임하고 나선 한국경제협의회도
의욕에 차있었다.

고희가 다된 김연수 회장은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

경제협의회는 개발차관(DLF)과 내자조달 등 재원문제를 해결하는데 역량을
집중했다.

이와 함께 미국원조가 줄어들 것에 대비해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이를 위해 협의회는 이미 3월초에 국제경제협조위원회를 열고 대일국교
정상화와 한.일간 경제협조 기본 대책을 수립할 것을 결의했었다(61년 협의회
사업계획서).

재계를 벼랑으로 몰았던 부정축재처리법안도 협의회의 활약으로 원만히
마무리됐다.

협의회는 2월부터 4개 단체(대한상의 무역협회 방직협회 건설협회)와 함께
정부를 설득해 이 법안 원안을 대폭 수정(처벌대상 5만7천여명에서 70여개사
로 축소)했다.

경제 마비를 막은 것이다.

정.재계의 당시 상황은 박정희가 반드시 군사 쿠데타를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는 얘기다.

내 얘기가 아니다.

외국인의 시각이 그랬다.

미 국무부 요원으로 당시 한국에서 근무했던 헨더슨은 "한국:소용돌이 정치
(KOREA:Politics of the Vortex.Gregory Henderson 1967)"라는 책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4월데모의 성공으로 학생들과 같이 불만을 가진 자들은 모두 불만을
토로했다.

61년 2월까지 데모가 없는 날이 거의 없었다.

4.19 혁명에서 5.16 쿠데타에 이르는 1년간 약 2천건의 데모가 일어났고
연 90만명이 참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위험한 대규모 데모는 없었다.

그리고 모든 신문들이 데모가 악화일로에 있다고 보도하는 것과는 역으로
정권(장면정부)의 최후 3개월은 오히려 개선돼가고 있었다"

정권은 안정을 찾았고 경제인들도 프로젝트를 통한 경제발전 참여에 한층
적극성을 보였다.

이때 이미 태백산을 중심으로 한 시멘트 제철 발전소 구상도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오늘날 쌍용 동양 한일 등 시멘트 업체의 싹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문제는 당시에도 돈이었다.

당시 미국원조가 줄면서 DLF차관이 경제계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정부도 이 차관 도입을 위해 60년 가을 김영선 재무장관을 미국에 파견
했었다.

김 장관은 50만 발전시설 건설을 위한 DLF 차관도입계약을 맺고 왔다.

주요한 부흥.상공장관도 군산발전소(6만kW) 기획차관 가계약을 맺었다.

연이어 여러 발전소 건설 차관 도입 교섭에 나섰다.

민간경제계도 이에 뒤질세라 동양화학과 동양시멘트 등이 차관도입에 열을
올렸다.

차관도입과 관련해서 빠뜨릴 수 없는 얘기가 있다.

바로 삼성 이병철 창업주가 추진한 한국비료 공장 건설 건이다.

국내 민간 기업의 대규모 차관교섭은 당시 삼성 이병철 사장이 비료공장
건설을 위해 처음 시도했고 성과를 올렸다.

이 사장은 비료사업의 성장성을 높게 봤다.

농업에 필요 불가결한 비료는 59년까지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연간 미 원조자금 2억5천만달러중 1억달러 내외를 비료도입에 충당했을
정도다.

당시에도 비료공장은 있었다.

충주비료 공장은 완공을 앞두고 있었다.

나주비료 공장도 건설 중이었다.

그러나 모두 가동돼 봐야 6만t 규모에 불과했다.

수요는 계속 증가해 61년에 30만t, 5년후인 66년에는 40만t이 될 것으로
추산되고 있었다.

이 사장은 수출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춘 비료공장이 되기 위해서는 세계
굴지의 최신식 대규모 시설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 규모를 35만t으로 하고 비료 종류는 암모니아가 아닌 한국에
적합한 요소비료와 복합비료를 한다는 것으로 계획을 잡았다.

1차 소요자금은 5천만달러, 당시 한국외환 사정으로는 천문학적인 거액
이었다.

이 사장은 이미 60년초 청와대로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해 승인을 얻었다.

소요금액이 4천만~5천만달러나 되니 이 대통령도 무척 놀란 기색이었다고
이 사장은 생전에 필자에게 말했었다.

이 대통령의 내락을 얻자 60년초 이 사장은 차관도입을 위해 독일과
이탈리아를 향해 떠났다.

국내는 3.15 부정선거로 어수선하던 때였다.

서독은 전후 부흥국의 선두주자로 80억달러의 외환보유고를 갖고 있었다.

이 사장은 차관선인 크루프 본사를 찾아 전권을 위임받은 부사장을 만났다.

사전에 충분히 설명해 놓아 한마디로 "좋다"는 답변을 들었다.

부사장은 "다만 정부의 지급보증은 시간이 걸리니 당신이 대주주로 있는
은행의 지급보증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시원스럽게 조언까지 해줬다.

이어서 이탈리아 몬테카티니그룹의 비료회사와 교섭했다.

이 회사는 30년대 이북의 흥남비료 공장 건설을 위해 암모니아 제조
기술을 1백만달러에 일본 노구지(기구)에 매도했던 기업이다.

독.이의 대회사들과 차관교섭에 성공한 이 사장은 세계 자본시장에서의
차관교섭에 유용한 경험과 자신을 얻게 됐다.

그러나 호사다마랄까.

순조롭게 진행되던 비료차관 교섭은 4.19후 소위 부정축재 처리 문제로
암초에 부닥치게 된다.

당시 학생을 선두로 한 국민여론은 소위 부정축재자들을 처벌하라고 아우성
이었다.

이 여론에 정면 도전할 수 없어 한국경제협의회는 앞서 얘기한 대로
일벌백계 원칙을 세워 크게 문제시되는 기업만 대상으로 하기로 했다.

대상에서 삼성은 빠지지 못했다.

당시 한국에서 제일 큰 기업군이었고 대표적인 부자였기 때문이다.

61년 이른 봄 이병철 사장은 비료 프로젝트 서류 일체를 김영선 재무장관
에게 맡기고 일본으로 떠나버렸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2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