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에 선 경영인] (2) '중견기업 사장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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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사장은 요즘 머리에 기름을 바르지 않는다.
외부인사를 만나는 일이 줄어서가 아니다.
예의를 차려야할 곳은 더 늘었다.
그러나 번지르한 머리기름이 어울리지 않는 자리가 대부분이다.
고참임원에게 명예퇴직을 "강요"해야 하는 자리에서, "한번만 더" 믿고
대출해 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은행에서 머리기름은 감점 요인이다.
인상 펼날 없는 회장 앞에서 머리를 긁적일 땐 더 그렇다.
머리기름을 안바른다고 아침 시간이 늘어난 건 아니다.
일산에서 시내 한복판까지 손수 운전을 하니 시간이 20분은 더 걸린다.
몇달전만 해도 운전기사가 있었다.
회사에 도착한 시간은 7시20분.
사원들이 출근하려면 30분은 더 남았다.
C사장이 맡고 있는 A사는 대기업 그룹에 속해 있는 중견회사.
제법 탄탄한 편이지만 요즘엔 그룹 전체가 흔들거리면서 증권가 루머에
"퇴출대상"으로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홍보실에서 올린 신문스크랩에는 우울한 소식뿐이다.
워낙 경제기사가 많아 스크랩만 보는데도 40~50분은 족히 걸린다.
오전 9시부터는 티타임을 겸한 간부회의.
작년까지만 해도 간부회의는 매주 월요일 오전에만 했다.
올들어서는 매일이다.
"오늘은 꼭 노조위원장을 만나 주셔야겠습니다"
"L지점장이 20억이상은 신규대출이 어렵다고 합니다"
"그저께 만난 미국 회계법인 사람들이 한번만 더 미팅을 갖자고 합니다"
보고마다 사장을 호출하는 사안들 뿐이다.
예전에는 이 정도면 담당부장들이 알아서 했다.
배석한 비서에게 일정 조정을 지시하고 회의를 끝냈다.
오후 2시엔 회장을 만나야 한다.
그룹 구조조정위원회가 열리는 날이다.
그가 맡은 일은 계열사 통폐합.
회장과 만나는 날은 그래서 오전부터 "퇴출 후보" 계열사에서 걸려오는
"민원성" 전화가 끊이질 않는다.
"C선배, 우리 회사는 경기만 좋아지면 금방 살아납니다"
"C사장님, 우리 인건비 절감 계획 잘 보시고 보고해 주세요"
"C사장, 규모를 줄이더라도 죽이지는 않았으면 하네"
선후배 사장들의 사연도 갖가지다.
건성으로 "알았다"고만 답하는데도 1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날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먹었다.
요즘엔 "외식"도 가려가면서 해야 한다.
오후 2시부터 회장실에서 열린 구조조정회의는 상반기 실적을 보고한
자리였다.
대부분 사장들이 붉은 줄을 친 장부를 앞에 놓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회장도 뾰족한 대안이 없는지 예전처럼 재털이를 집어던지진 않았다.
오후 4시.
족히 30cm는 됨직한 결재판을 펴 보지도 못하고 주거래은행으로 향했다.
여신담당임원을 만났다.
"A사야 괜찮지만 지급보증이 풀리지 않은게 많아서..."라며 말꼬리를
흐리는 그와는 대화 자체가 힘들었다.
1시간 30분을 버티고 앉아 겨우 "검토해 보겠다"는 얘길 들었다.
회사에 다시 도착한건 오후 6시.
속 편하게 퇴근하는 말단직원들이 부럽다.
희망퇴직금 문제를 협의하러 상경한 노조간부들과의 저녁이 오후 7시부터다.
오늘은 소주라도 한잔 해야할 것 같다.
비서가 챙겨주는 전화메모만 20건이 넘었다.
눈에 띄는 메모가 있었다.
친하게 지냈던 중견그룹 L사장이었다.
"출국금지 당했다"고 말하는 허탈한 표정이 전화로도 보였다.
그는 "C형도 빨리 챙겨서 나오는게 좋을 것"이란 충고까지 달았다.
노조간부들과의 대화에선 "위원장 한 번만 봐주쇼"로 일관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2차는 총무부장에게 맡기고 밤9시30분께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수출부와 관리파트가 사용하는 층에는 불이 환했다.
관리파트는 내일 공정거래위원회와 국세청 감사받을 준비를 하는 모양이다.
술도 깰 겸 사장실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사내메일을 검색했다.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빨리 제시하지 않으면 기술파트엔 동요가 올지
모른다"는 경영조언에서부터 "2년째 후배를 못받았더니 회사다닐 맛 안난다"
는 푸념까지 들어 있었다.
"아주버님이 1주일만 돌리게 2천만을 빌려 달라고 해서 없다고 했어요.
서운해 하데요. 우리 회사는 괜찮은 거지요"
밤 11시30분 아내의 걱정어린 목소리를 뒤로 하고 잠을 청했다.
기름 바르지 않은 머리가 잠자리에선 편했다.
< 권영설 기자 yskwon@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28일자 ).
외부인사를 만나는 일이 줄어서가 아니다.
예의를 차려야할 곳은 더 늘었다.
그러나 번지르한 머리기름이 어울리지 않는 자리가 대부분이다.
고참임원에게 명예퇴직을 "강요"해야 하는 자리에서, "한번만 더" 믿고
대출해 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은행에서 머리기름은 감점 요인이다.
인상 펼날 없는 회장 앞에서 머리를 긁적일 땐 더 그렇다.
머리기름을 안바른다고 아침 시간이 늘어난 건 아니다.
일산에서 시내 한복판까지 손수 운전을 하니 시간이 20분은 더 걸린다.
몇달전만 해도 운전기사가 있었다.
회사에 도착한 시간은 7시20분.
사원들이 출근하려면 30분은 더 남았다.
C사장이 맡고 있는 A사는 대기업 그룹에 속해 있는 중견회사.
제법 탄탄한 편이지만 요즘엔 그룹 전체가 흔들거리면서 증권가 루머에
"퇴출대상"으로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홍보실에서 올린 신문스크랩에는 우울한 소식뿐이다.
워낙 경제기사가 많아 스크랩만 보는데도 40~50분은 족히 걸린다.
오전 9시부터는 티타임을 겸한 간부회의.
작년까지만 해도 간부회의는 매주 월요일 오전에만 했다.
올들어서는 매일이다.
"오늘은 꼭 노조위원장을 만나 주셔야겠습니다"
"L지점장이 20억이상은 신규대출이 어렵다고 합니다"
"그저께 만난 미국 회계법인 사람들이 한번만 더 미팅을 갖자고 합니다"
보고마다 사장을 호출하는 사안들 뿐이다.
예전에는 이 정도면 담당부장들이 알아서 했다.
배석한 비서에게 일정 조정을 지시하고 회의를 끝냈다.
오후 2시엔 회장을 만나야 한다.
그룹 구조조정위원회가 열리는 날이다.
그가 맡은 일은 계열사 통폐합.
회장과 만나는 날은 그래서 오전부터 "퇴출 후보" 계열사에서 걸려오는
"민원성" 전화가 끊이질 않는다.
"C선배, 우리 회사는 경기만 좋아지면 금방 살아납니다"
"C사장님, 우리 인건비 절감 계획 잘 보시고 보고해 주세요"
"C사장, 규모를 줄이더라도 죽이지는 않았으면 하네"
선후배 사장들의 사연도 갖가지다.
건성으로 "알았다"고만 답하는데도 1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날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먹었다.
요즘엔 "외식"도 가려가면서 해야 한다.
오후 2시부터 회장실에서 열린 구조조정회의는 상반기 실적을 보고한
자리였다.
대부분 사장들이 붉은 줄을 친 장부를 앞에 놓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회장도 뾰족한 대안이 없는지 예전처럼 재털이를 집어던지진 않았다.
오후 4시.
족히 30cm는 됨직한 결재판을 펴 보지도 못하고 주거래은행으로 향했다.
여신담당임원을 만났다.
"A사야 괜찮지만 지급보증이 풀리지 않은게 많아서..."라며 말꼬리를
흐리는 그와는 대화 자체가 힘들었다.
1시간 30분을 버티고 앉아 겨우 "검토해 보겠다"는 얘길 들었다.
회사에 다시 도착한건 오후 6시.
속 편하게 퇴근하는 말단직원들이 부럽다.
희망퇴직금 문제를 협의하러 상경한 노조간부들과의 저녁이 오후 7시부터다.
오늘은 소주라도 한잔 해야할 것 같다.
비서가 챙겨주는 전화메모만 20건이 넘었다.
눈에 띄는 메모가 있었다.
친하게 지냈던 중견그룹 L사장이었다.
"출국금지 당했다"고 말하는 허탈한 표정이 전화로도 보였다.
그는 "C형도 빨리 챙겨서 나오는게 좋을 것"이란 충고까지 달았다.
노조간부들과의 대화에선 "위원장 한 번만 봐주쇼"로 일관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2차는 총무부장에게 맡기고 밤9시30분께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수출부와 관리파트가 사용하는 층에는 불이 환했다.
관리파트는 내일 공정거래위원회와 국세청 감사받을 준비를 하는 모양이다.
술도 깰 겸 사장실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사내메일을 검색했다.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빨리 제시하지 않으면 기술파트엔 동요가 올지
모른다"는 경영조언에서부터 "2년째 후배를 못받았더니 회사다닐 맛 안난다"
는 푸념까지 들어 있었다.
"아주버님이 1주일만 돌리게 2천만을 빌려 달라고 해서 없다고 했어요.
서운해 하데요. 우리 회사는 괜찮은 거지요"
밤 11시30분 아내의 걱정어린 목소리를 뒤로 하고 잠을 청했다.
기름 바르지 않은 머리가 잠자리에선 편했다.
< 권영설 기자 yskwon@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2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