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민 < 한국경제신문사 논설실장 >

노부모를 모신 자녀에게 상속지분을 50% 더 늘려준다는 민법개정안이
입법예고됐다.

효도상속제라 이름붙은 이 제도를 신설하려는 의도는 설명을 듣지않더라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좋기만한 제도일까.

어쩌면 꼭 그렇지만도 않을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상속 따위와는 전혀 관계없이 노부모를 모실 사람의 효성을 자칫 폄하는
구실로 작용하는 꼴은 되지않을지 모르겠다.

오랜 기간 부모님 속만 태웠던 탕자가 어느날 갑자기 철이 들고,쇠약해진
노부모의 모습에 금할 수 없는 애정을 느끼는 경우라면 어떻게 될까.

부모님을 모시겠다고 나서면 돌아가실 때가 다 되니 상속재산 탐이 나는
모양이라고 주위에서 비아냥거릴까봐, 어쩌면 다른 형제들이 불쾌하게 받아
들일까봐 조바심을 해야하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마지막 효도의 기회마저 갖지못하게 된다면, 이른바 효도상속제는
없느니만도 못하지않을까.

노부모 입장에서 생각해봐도 경우에 따라서는 문제가 있다.

경제력이 있는 노부모중에는 자식들과 따로 살고싶어하는 이들도 결코 적지
않다.

가족에 대한 인식은 노부모들도 전같지않은게 현실이다.

"손주는 오면 반갑지만 가면 더 반갑다"는 게 꼭 우스갯 말만은 아니다.

바로 그런 노부모에게 효도상속제가 불편을 줄 가능성은 없다고 하기만도
어렵다.

지금은 "나는 따로 사는게 편하다"는 말을 부담없이 할 수 있지만 앞으로는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미풍양속을 보존하려는 입법의도와는 달리 결과적으로 법으로 규율하지
아니함만 못했던 경우는 결코 적지않다.

이번에 함께 입법예고된 동성동본금혼제폐지만해도 그렇다.

근친혼은 우생학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동성동본금혼제는 촌수가 멀면 그럴
염려가 전혀 없기 때문에 폐지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해온 일부 여성단체의
주장은 논리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친척들은 물론 촌수를 따지기도 어려운 먼 일가들도 모여사는
집성촌에서 어린 날을 보낸 50대 이상들에겐 또다른 느낌도 없지 않다.

며느리들과 딸네들, 그리고 총각은 물론 중장년층까지 한데 어울려,
정월이면 마을안을 흐르는 개울 동쪽과 서쪽으로 편을 갈라 윷놀이를 하고,
봄이면 참꽃(진달래) 핀 계곡에서 가졌던 화전놀이의 기억이 아련한 적지
않은 사람들에겐 그렇다.

일가라는 단 한가지 이유때문에 잦은 만남이 없어도 아지매 누님 호칭이
자유스럽고 스스럼이 없었던 사람들에겐 동성동본금혼은 우생학따위와는
관계없이 영원히 보존하고 싶은 미풍양속이다.

그것이 사회적인 쟁점이 되는 불행한 사태가 생긴 까닭은 자명하다.

관습의 영역을 법률이 침해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동성동본금혼이 법률사항
이 아니었다면 애당초 이 문제로 시끄러울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법률로 금지했던 것을 어느날 폐지하게되면 상징적인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아예 처음부터 금지하지않았던 것보다 더 못하게 마련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법을 만들때는 법률의 영역이 어디까지여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긴요하다.

좋은 것은 다 법으로 정하는 것이 옳다는 시각은 문제가 있다.

그야말로 전시대적인 사고다.

그것은 한꺼풀 뒤집어보면 민간자율에 대한 철저한 불신을 의미한다.

만사를 법으로 규제해야하고 공권력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이제 불식돼야할 때가 됐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규제완화구호가 더 높지만 아무것도 피부에 와닿는게
없는 까닭도 따지고보면 간단하다.

정부에서 만사를 다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정말 규제를 없애려면 행정부의 법안제안권 자체를 없애는 것도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입법권이 국회의 전유물이된다면 법률의 양산은 어느정도 제동이 걸리고
규제도 줄것 역시 자명하다.

시대적 과제인 자율은 따지고보면 다른 뜻이 아니다.

법이 가정의 문턱을, 학교의 울타리를 넘어 들어갈 수 있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가 어떤 경우인지 명백히 하고, 그런 경우가 아니면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유행어가 된 시장경제도 그렇다.

시장에서 결정되는 경제가 시장경제라고 보면, 정부에서 콩도 놓고 팥도
놓는 식이어서는 영원히 부르다가 말 노래일 수밖에 없다.

법과 공권력의 영역이 어디까지여야 하는지 정말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2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