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김경천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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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봉천에 유명한 항일독립군장교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가 개교한 것은
1920년5월3일이다.
당시 이 학교에는 3천으로 불렸던 장교 세 사람이 교관으로 있었다.
대한제국 육군소위였던 신팔균은 동천, 일본군기병 중위였던 김광서는 경천,
일본육군보병 중위였던 지석규는 청천으로 개명한 이름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별호다.
김경천과 지청천은 대한제국 정부파견으로 일본육사를 졸업했다.
이들은 1919년 도쿄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하자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함께 만주로 건너갔다.
함북 북청출신인 김경천은 부친이 대한제국의 포병부령 군기창장을 지낸
무관집안의 후손이다.
1920년 독립군 무기 구입을 위해 연해주에 갔던 그는 이항사변을 목격한다.
무고한 한국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것을 목격한 그는 그곳에 머물면서
한국인청년들을 모아 항일 무장부대를 편성해 일군 토벌에 나섰다.
한때는 6백명의 "김경천 기병부대"를 이끌고 러시아의 적군과 연합해
일본군은 물론 그들의 지원하에 활동하는 백군을 상대로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백마를 타고 시베리아 벌판을 누비는 그의 활약상은 전설처럼 국내에
전해져 한때 "원조 김일성"이라는 설까지 나왔다.
그러나 1922년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자 적군은 그를 배신했다.
무장해제를 당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구로지코에 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 사관 양성에 진력하면서 재규합을 꾀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3년간 옥살이도 했고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당한 뒤에는 집단농장의
작업반장으로 일하다가 "인민의 적"으로 투옥돼 1942년 옥사했다.
정부가 15일 정부수립 50주년 기념식에서 김경천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주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지나치게 사상적으로 의심받았던 홍범도장군 서훈에 이은 쉽지않은 결단인
셈이다.
무엇보다 신흥무관학교 "3천"중 홀로 남았던 김경천장군의 서훈이라서
더 뜻깊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14일자 ).
1920년5월3일이다.
당시 이 학교에는 3천으로 불렸던 장교 세 사람이 교관으로 있었다.
대한제국 육군소위였던 신팔균은 동천, 일본군기병 중위였던 김광서는 경천,
일본육군보병 중위였던 지석규는 청천으로 개명한 이름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별호다.
김경천과 지청천은 대한제국 정부파견으로 일본육사를 졸업했다.
이들은 1919년 도쿄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하자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함께 만주로 건너갔다.
함북 북청출신인 김경천은 부친이 대한제국의 포병부령 군기창장을 지낸
무관집안의 후손이다.
1920년 독립군 무기 구입을 위해 연해주에 갔던 그는 이항사변을 목격한다.
무고한 한국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것을 목격한 그는 그곳에 머물면서
한국인청년들을 모아 항일 무장부대를 편성해 일군 토벌에 나섰다.
한때는 6백명의 "김경천 기병부대"를 이끌고 러시아의 적군과 연합해
일본군은 물론 그들의 지원하에 활동하는 백군을 상대로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백마를 타고 시베리아 벌판을 누비는 그의 활약상은 전설처럼 국내에
전해져 한때 "원조 김일성"이라는 설까지 나왔다.
그러나 1922년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자 적군은 그를 배신했다.
무장해제를 당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구로지코에 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 사관 양성에 진력하면서 재규합을 꾀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3년간 옥살이도 했고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당한 뒤에는 집단농장의
작업반장으로 일하다가 "인민의 적"으로 투옥돼 1942년 옥사했다.
정부가 15일 정부수립 50주년 기념식에서 김경천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주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지나치게 사상적으로 의심받았던 홍범도장군 서훈에 이은 쉽지않은 결단인
셈이다.
무엇보다 신흥무관학교 "3천"중 홀로 남았던 김경천장군의 서훈이라서
더 뜻깊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1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