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침을 거듭한 한국 재계사에는 "신데렐라"들이 적지 않았다.

은인자중 실력을 기르며 기업가의 꿈을 키운 이들은 어느날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나 재계를 놀라게했다.

이들은 젊은이들에게 기업가의 꿈을 심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몰락하면서 냉정한 기업의 생리도 일깨워줬다.

한국 재계의 신데렐라로는 "제세"와 "율산"을 빼놓을 수 없다.

스위스회사의 한국지점에 근무하던 이창우는 지난 74년 퇴직금 5백만원으로
부품공장을 차렸다.

실패를 거듭한 끝에 정밀기계공업에서 재미를 봐 돈을 모았다.

77년에는 수출에 눈을 돌렸다.

3각무역을 통해 큰 돈을 벌었다.

78년에는 해운업까지 사업을 확대했다.

이어 섬유 전자 건설 등으로 순식간에 사업영역을 넓혔다.

사업시작 5년만에 재벌소리를 듣게 됐다.

그러나 제세는 이란 테헤란의 도시계획에 참여하려고 부실기업인 대한전척을
인수한 것이 화근이 돼 재계 지도에서 사라졌다.

제세와 함께 70년대 젊은이들에게 기업가의 꿈을 갖게 한 사람중 하나가
율산의 신선호다.

그는 26세이던 74년 1백만원을 갖고 오퍼상을 시작했다.

그는 당시 국내에 남아돌던 시멘트 수출로 돈을 벌었다.

율산은 이어 신진알미늄을 인수해 제조업에 뛰어들었고 해운 건설 섬유
관광 등으로 영역을 넓혔다.

77년말에는 11개 계열사 7천여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그룹을 일궜다.

78년초에는 종합상사 지정도 받았다.

잠실호수부지 30만평을 매입하는 등 부동산도 늘려갔다.

그는 그러나 78년 국내 경기 호황으로 건축자재를 수출하기가 어려워지면서
자금난에 빠졌다.

서울신탁은행이 부실기업인 대한전자와 광성피혁을 떠맡기면서 사태는 더
심각해졌다.

여기다 정부 고위층에 밉보이면서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국 신선호는 79년 외국환관리법위반 및 업무상 횡령혐의로 구속됐다.

그리고 율산의 이름도 잊혀졌다.

김철호의 "명성"은 초기부터 승승장구했던 제세나 율산과는 달랐다.

호남비료에 다니던 그는 29세이던 66년 운수회사를 차렸다.

한때 1백30대의 코로나택시를 가진 대운수업자가 되기도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망했다.

78년 관광업에 손댔다가 실패한 그는 79년 오성골프장을 인수하면서 레저
산업을 일군다.

81년4월부터 콘도미니엄을 분양하며 돈을 벌었다.

레저 관광 건설 무역 전자 식품 등 21개 계열기업을 거느린 재벌그룹으로
급부상했다.

그가 사업용으로 사들인 땅은 얼마후 금싸라기 땅으로 둔갑했다.

자연히 의혹이 쏠렸고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받게 됐다.

그는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비난하는 광고를 냈다가 83년8월 업무상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이들의 공통적 특징은 적은 돈으로 아이디어 하나만 믿고 도전했다는
점이다.

또 몰락 과정에 상당히 정치적인 곡절이 끼여 있었다는 것도 비슷한 점이다.

이들이 일궜던 기업들은 더러 퇴출되기도 했지만 상당수는 기존 업체들에
인수돼 아직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 재계에 "도전과 응전"의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광명(이수왕) 한보(정태수) 나산(안병균) 거평그룹(나승렬) 등이
이들의 전철을 밟았다.

< 권영설 기자 yskwon@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1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