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건국50년 '내가 본 이승만 대통령' .. 올리버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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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T. 올리버 박사(90).
그는 신생 대한민국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최측근 고문이었다.
이 대통령의 원고를 도맡아 섰고 크고 작은 대부분의 일에 대해 자문했다.
"이승만과 미국의 개입" 등 50여권의 한국관련 저서도 있다.
대한민국 건국 50주년을 바라보는 그의 감회는 남다르다.
워싱턴 근교 헤론 포인트라는 노인촌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그를 만났다.
-이승만 박사는 한마디로 어떤 사람이었나요.
<>선동가였다고 하는 것이 어떨까요.
외교적 수사를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이박사는 "내가 선동적이지 않으면 누가 우리에게 관심을 갖겠는가"고
반문하곤 했습니다.
"처음에는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을 모으기 위해 그렇게 했는데 이제는
습관이 돼버려 고칠 수도 없게 됐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독립운동을 위해 뛰는 그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행동이었습니다.
-독재자였다는 평가도 있는데 찬성하십니까.
<>50년이 지난 지금 그런 평가는 수정될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그는 결코 독재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국정현안들에 대해 의회와 끊임없는 투쟁을 벌였고 다른 정당들과도
논쟁을 일삼았습니다.
투쟁과 논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독재자가 아니었다는 증거들이지요.
박정희씨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만들어 의회를 거수기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정권을 쟁취하는 과정에서도 초법적인 수단을 동원했습니다.
이런 것이 독재입니다.
어떤 사람은 부패한 독재자라는 표현까지 쓰지만 전두환씨나 노태우씨처럼
많은 돈을 뇌물로 챙기는 것이 부패한 것이지 그는 내게 지급할 고문료도
제대로 없었어요.
-가장 기억나는 일이라면.
<>역시 대한민국 건국입니다.
이 박사는 8월15일에 있을 기념연설문을 쓰라고 하더군요.
완성해서 들고 갔더니 몇마디 손보고는 기자들에게 배포하라고 했습니다.
건국일이고 해서 많은 외국기자들이 모여들었고 이를 기초로 기사를
송고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연단에 오른 이박사의 연설은 원고와 전혀 다른 즉흥
연설이더군요.
그런데 그 즉흥연설이 내가 작성한 연설문보다 훨씬 감동적이었어요.
이 박사가 나중에 말하더군요.
그동안 마음속에 묻혀 있던 모든 것들이 마구 튀어 내가 쓴 연설문을 쳐다볼
시간 자체가 없었다고.
-미국에 대한 이 박사의 시각이 좋지않았는데요.
<>이 대통령은 미국으로부터 20억달러라는 당시로서는 적지않은 원조를
받으면서도 비난과 불만표시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사이가 좋을 리 없었습니다.
어찌됐건 이 박사는 신탁통치등에 대한 반대입장을 버리지 않는
원칙주의자였어요.
-한국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책임을 면할 수는 없는데.
<>이 대통령은 북한이 소련의 지원을 받아 군비를 증강하고 있다는 정보를
미국쪽에 계속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이 대통령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했지요.
6.25전쟁은 미국의 탈아시아정책의 산물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장기집권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이박사에게 이제 그만 두고 "원로 정치인"으로 남으라고
충고했습니다.
두번 이상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도 했지요.
그러나 그는 "한국 국내정치에 대해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때 일을 아주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박사가 경제는 도외시 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는데.
<>한국인은 절대왕조에 이어 36년간 일제의 식민지배하에 있었습니다.
새 정부와 새 체제를 국민속에 뿌리내리게 하는 과정 자체만으로도 너무
힘든 일이었습니다.
한국은 실제로 50년이 지나고서야 민주주의다운 민주주의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가 경제를 소홀히 했다는 것은 당치 않습니다.
미국 원조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장"이라며 자본을
끌어들이려 애를 썼어요.
박정희씨는 이승만대통령과 그 세대 인물들을 딛고 올라서서 경제를
일구었다고 봐야지요.
-현정부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나는 김대중 대통령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겪은 시련과 용기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가 위기에 빠진 한국경제를 반석위에 다시 올려놓아 민주주의와 경제를
재구축한 대통령으로 기록되기를 기대합니다.
< 워싱턴=양봉진 특파원 bjnyang@aol.com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15일자 ).
그는 신생 대한민국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최측근 고문이었다.
이 대통령의 원고를 도맡아 섰고 크고 작은 대부분의 일에 대해 자문했다.
"이승만과 미국의 개입" 등 50여권의 한국관련 저서도 있다.
대한민국 건국 50주년을 바라보는 그의 감회는 남다르다.
워싱턴 근교 헤론 포인트라는 노인촌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그를 만났다.
-이승만 박사는 한마디로 어떤 사람이었나요.
<>선동가였다고 하는 것이 어떨까요.
외교적 수사를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이박사는 "내가 선동적이지 않으면 누가 우리에게 관심을 갖겠는가"고
반문하곤 했습니다.
"처음에는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을 모으기 위해 그렇게 했는데 이제는
습관이 돼버려 고칠 수도 없게 됐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독립운동을 위해 뛰는 그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행동이었습니다.
-독재자였다는 평가도 있는데 찬성하십니까.
<>50년이 지난 지금 그런 평가는 수정될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그는 결코 독재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국정현안들에 대해 의회와 끊임없는 투쟁을 벌였고 다른 정당들과도
논쟁을 일삼았습니다.
투쟁과 논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독재자가 아니었다는 증거들이지요.
박정희씨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만들어 의회를 거수기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정권을 쟁취하는 과정에서도 초법적인 수단을 동원했습니다.
이런 것이 독재입니다.
어떤 사람은 부패한 독재자라는 표현까지 쓰지만 전두환씨나 노태우씨처럼
많은 돈을 뇌물로 챙기는 것이 부패한 것이지 그는 내게 지급할 고문료도
제대로 없었어요.
-가장 기억나는 일이라면.
<>역시 대한민국 건국입니다.
이 박사는 8월15일에 있을 기념연설문을 쓰라고 하더군요.
완성해서 들고 갔더니 몇마디 손보고는 기자들에게 배포하라고 했습니다.
건국일이고 해서 많은 외국기자들이 모여들었고 이를 기초로 기사를
송고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연단에 오른 이박사의 연설은 원고와 전혀 다른 즉흥
연설이더군요.
그런데 그 즉흥연설이 내가 작성한 연설문보다 훨씬 감동적이었어요.
이 박사가 나중에 말하더군요.
그동안 마음속에 묻혀 있던 모든 것들이 마구 튀어 내가 쓴 연설문을 쳐다볼
시간 자체가 없었다고.
-미국에 대한 이 박사의 시각이 좋지않았는데요.
<>이 대통령은 미국으로부터 20억달러라는 당시로서는 적지않은 원조를
받으면서도 비난과 불만표시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사이가 좋을 리 없었습니다.
어찌됐건 이 박사는 신탁통치등에 대한 반대입장을 버리지 않는
원칙주의자였어요.
-한국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책임을 면할 수는 없는데.
<>이 대통령은 북한이 소련의 지원을 받아 군비를 증강하고 있다는 정보를
미국쪽에 계속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이 대통령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했지요.
6.25전쟁은 미국의 탈아시아정책의 산물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장기집권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이박사에게 이제 그만 두고 "원로 정치인"으로 남으라고
충고했습니다.
두번 이상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도 했지요.
그러나 그는 "한국 국내정치에 대해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때 일을 아주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박사가 경제는 도외시 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는데.
<>한국인은 절대왕조에 이어 36년간 일제의 식민지배하에 있었습니다.
새 정부와 새 체제를 국민속에 뿌리내리게 하는 과정 자체만으로도 너무
힘든 일이었습니다.
한국은 실제로 50년이 지나고서야 민주주의다운 민주주의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가 경제를 소홀히 했다는 것은 당치 않습니다.
미국 원조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장"이라며 자본을
끌어들이려 애를 썼어요.
박정희씨는 이승만대통령과 그 세대 인물들을 딛고 올라서서 경제를
일구었다고 봐야지요.
-현정부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나는 김대중 대통령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겪은 시련과 용기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가 위기에 빠진 한국경제를 반석위에 다시 올려놓아 민주주의와 경제를
재구축한 대통령으로 기록되기를 기대합니다.
< 워싱턴=양봉진 특파원 bjnyang@aol.com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1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