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계와의 인연 ]]

민주당 정부 시절 얘기를 끝내면서 내가 재계와 인연을 맺게 된 경위를
설명해야 할 것 같다.

내가 본격적으로 경제단체에 몸을 담고 일한 것은 박정희 정권
초기부터이기 때문이다.

기업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내가 민간경제계와 인연을 맺은 것은 우연한
계기였다.

솔직히 말하면 62년 10월17일 한국경제인협회(전경련 전신) 사무국장으로
임명되기 전까지 이 협회의 이름을 똑똑히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61년 1월 한국경제협의회라는 이름으로 처음 창립될
때부터 사무국장 후보로 거론됐었다.

그런 사실을 당시에는 몰랐다.

나를 사무국장에 세번이나 추천한 이는 동아일보 주필을 지냈고 지금도
역사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성한씨였다.

그는 내가 재계와 간접적으로나마 인연을 맺게 한 사람이기도 했다.

60년초 대한양회 이정림사장이 설립한 삼일문화연구소를 통해서였다.

김성한씨는 당시 이 삼일문화연구소에서 "세계"라는 월간 학술지를
발간했다.

"세계"는 학계와 대학의 발전을 위해 선진국의 학술논문을 번역 소개하기
위해 만든 잡지였다.

나는 이 "세계"에 미국과 영국의 경제 정치 사회학 등 분야의 논문을
닥치는 대로 번역해 매월 기고했다.

당시 한국에 갓 소개되기 시작한 로스토 교수의 "경제발전 단계론"에
대한 소개.비평 논문도 두 세편 썼다.

특히 미국에서 막 주목받기 시작한 행위과학에 대한 논문도 번역해
실었다.

삼일문화연구소와 "세계"를 통해 많은 지식인들을 알게 됐다.

경제 정치 학계 인사들, 심이어 문화계 인사까지도 자주 접촉하게 됐다.

이때 사귄 학계 문화계 인사들은 후일 내가 전경련 사무국을 맡아 일할
때 많은 도움을 줬다.

경제단체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무엇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아마도 내 성격상 교편을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기회도 있었다.

60년 가을학기쯤으로 기억된다.

연세대학교 법정대학에서 재정 기획 인사 등을 강의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누구의 소개였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아마 "세계"를 통해 알게된 교수 가운데 한명이었을 것이다.

당시는 외국을 다녀온 이들이 적을 때라 유학생은 희소가치가 있었다.

연세대측은 당시 내 직책(산업개발위원회 보좌위원)을 그대로 갖고
주 9시간 수업을 하되 아무런 보직도 맡기지 않겠다는 파격적인 조건까지
제시했다.

그러나 최종 결정단계에서 "못가겠다"고 정중히 사양했다.

교수직을 포기한 이유는 이런 것이었다.

그때 내 나이 이미 30대 중반으로 학자가 되기에는 늦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 영국 유학 당시 지도 교수들의 저서나 논문에 압도 당한 경험이
떠올랐다.

교수가 되려면 매학기 강의결과를 책으로 펴내는 그들 수준은 돼야 한다는
주제넘은 생각을 한 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날 "세계" 편집회의가 끝난 후 고려대 국제정치학과 민병기 교수가
나를 잡았다.

그는 불쑥 "나하고 같이 국제정치학을 가르쳐보자"고 제안했다.

박사학위도 없는 나에게 이런 제의를 하다니 어안이 벙벙했다.

나중에 주프랑스 대사까지 지낸 민교수는 결코 농담을 할 인물이 아니었다.

나 정도의 기초가 있으면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당시는 그런 시대였다.

어쨌든 내가 자유당과 민주당 정권에서 3개년계획 5개년계획을 만들고
"세계"를 통해 교유범위를 넓혀오던 중에 정권은 또 바뀌었다.

군사정권하에서 경제단체도 새로운 역할과 인물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김성한씨는 내가 평소 한국경제발전 방향과 전략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를 강력하게 천거했던 것 같다.

경제단체로 오라는 제의를 받았을 때 나는 대학에서 요청이 왔을 때보다
더 많은 고민을 했다.

과연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미 마음은 정해져 있었다.

민주당 시절 종합경제회의에 참가하고 또 정부 수뇌들을 접촉하면서
경제야말로 힘을 모아 일으켜야 할 최우선 과제라는 것을 잘알고 있던
터였다.

게다가 나의 사고 스타일을 볼 때 경제단체가 대학보다 훨씬 잘
어울린다는 결론도 갖게 됐다.

또 경제단체에 가서 해야할 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결정을 지었다.

바로 세계 각국과의 교류를 통한 개방정책을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일제강점기간 만주 간도 연변자치주 등 중국동북부를 많이
돌아다녔다.

광복 후에는 미국과 영국에서 공부도 했다.

이 과정에서 부지불식간에 역사나 문화에 대한 비교감각이 생겼다.

앞선 나라들이 저렇게 잘된 이유는 무엇일까를 고민해보면 결론이
정해진다.

새로운 착상은 항상 교류와 비교에서 발생한다는 것이 내 신념이었던
것이다.

경제단체에 몸 담기로 결정한 데는 빠뜨릴 수 없는 이유가 또 있다.

바로 기업인들에 대한 믿음이었다.

당시 기업인들은 척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모험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분야에도 뒤지지 않는 정보력이 있었다.

게다가 순수했다.

적어도 내가 접했던 사람들은 그랬다.

어떤 아이디어든 착상만 갖고는 실현될 수 없다.

조직이 있어야 한다.

토인비가 말하는 "창조적 집단"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근대국가로의 경제발전을 위해 한국은 수출주도 개발전략을 밀어붙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조직이 필요하다.

나는 그것이 한국경제협회를 통해 가능하다고 믿었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2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