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벡 < 미국 한국경제연구원 수석연구원 >

한국의 재벌은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

현재의 위기는 과거 그 어느때보다도 긴박하다.

구조조정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재벌은 한때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끌어온 견인차였다.

이들은 과거 박정희 정권시절 국가가 주도하는 성장지향 경제구조에서
무섭게 자라왔다.

정부는 "선택된 기업"에 사업자금을 초저리에 쓸 수 있는 특혜를 줬다.

또 각종 규제로 시장을 닫아걸고 발아단계인 국내 산업을 철저히 보호했다.

하지만 상황은 돌변했다.

한보철강의 부도이후 구조적인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급변하는 국제 경쟁환경도 한국기업들에 만만찮은 위협을 가하고 있다.

한국기업들은 기술경쟁사회로 나아갈수록 기술력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다.

세계화의 흐름속에 국내 시장이 개방되면서 경쟁은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

"고임금.고금리.고환율"의 3고현상은 성장의 발목을 질기게 붙들고
늘어졌다.

그 결과 한국 기업들의 국제 경쟁력은 무섭게 곤두박질치고 있다.

최근 맥킨지 보고서가 펴낸 국제경쟁력 순위를 보면 한국은 2년전 18위에서
35위로 추락해 있다.

필리핀 멕시코 터키에까지 뒤처진 수준이다.

기업문화도 위기의 일단을 제공했다.

국제화 시대 경쟁을 위해선 그룹총수들이 폭넓은 견해에 귀를 기울이는
"열린 경영" 스타일이 필요하다.

전문 경영인을 영입하고 그들에게 오너에 상응하는 권한을 부여하는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단행할 때다.

재벌이 추진해야 할 또하나의 과제는 투명성과 신뢰성을 구축하는 일이다.

주한미국상공회의소(AMCHAM)가 4월 내놓은 보고서는 한국 기업과 금융기관의
재정상태에 대한 정보를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보여준다.

그동안 한국기업들은 불투명한 회계관행을 통해 상호 지급보증을 감추고
부당한 이익보전을 하면서 부실경영을 키워 왔다.

이젠 소액주주와 기관투자가들도 기업경영상태를 바로 알고 정당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정부도 투명성과 신뢰성을 제고하기 위해 앞장서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 5월 외자유치를 위해 뉴욕세일즈까지 나섰다.

하지만 이같은 "쇼맨십"보다 중요한 것은 실질적인 "규제해제"다.

한국에 대한 외국인 직접투자는 92년부터 97년까지 0.93%가 늘었을 뿐이다.

태국의 경우 25.43%가 증가한 것에 비하면 상당히 뒤처져 있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외국인 투자 원스탑 서비스" 등도 중요하지만 우선
규제완화와 개혁에 대한 의지부터 확인시켜야 한다.

이런 점에서 기업의 생사결정이 명확한 법적잣대가 아닌 케이스별로 처리된
점은 대단히 유감스럽다.

일부그룹에 협조융자를 제공한 것도 부실기업 정리 의지를 의심케 한다.

또한 부도판정을 받은 기업들 상당수가 아직까지도 최종 부도처리가 되지
않은 상태다.

정부나 기업의 개혁의지가 모호하게 비춰지는 것은 절대적으로 마이너스
요인이다.

이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역시 총체적인 리스트럭처링이다.

단기적으로 한국기업들의 구조조정은 자금압박을 극복하고 캐시플로를
유지하는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나아가 3~4개의 주력기업을 선별해 경영의 투명성과 신뢰성을 구축하고
핵심역량에 집중해야 한다.

5대 재벌이 밝힌 리스트럭처링 계획에는 점진적인 진전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계열사 합병이나 매각 등 가장 민감하고 핵심적인 이슈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분명한 상태다.

재벌이 살아 남는가의 열쇠는 전적으로 이들이 현실을 직시하고 구조개혁을
정면으로 돌파하느냐에 달려 있다.

오로지 정공법만이 살길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2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