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의 노사분규는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의 파업해결 방식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정리해고라는 쟁점은 같았다.

그러나 법질서를 파괴한 파행적 협상과 정부여당의 비상식적 개입, 폭력
사태의 발생 등은 서로 달랐다.

철저히 노사간의 협상을 통해 합의한 GM의 사례는 이번 현대자동차사태를
바라보는 시금석이 될수 있다.

<> 정부 개입

GM의 파업에 대해 미국정부가 시종일관 유지해온 원칙은 "무간섭
당사자주의"였다.

합의과정은 물론 합의결과에 대해서도 노사 양측이 전적인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이는 파업이 끝난 뒤에도 노사가 약속한 합의사항을 자율적으로 실천케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GM의 파업으로 미국 국내총생산(GNP)가 0.3%나 떨어졌지만 워싱턴의 클린턴
민주당 정부는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끝까지 인내하는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이와는 딴판이었다.

현대자동차에서 파업이 발생한뒤 정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개입했다.

노동부장관은 두차례나 현장을 방문,중재안을 내놓고 노사 양측을 설득했다.

여당 국회의원들도 중재단으로 나서 양측의 의견을 조율했다.

이에대해 노동계 일각에서는 명백한 제3자 개입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간 상급노동단체가 개별사업장의 노사분규에 참가한 행위를 제3자 개입
으로 규정, 사법처리 운운해온 정부가 이율배반적 행태를 보였다는 것이다.

공권력의 투입없이 일단 평화적으로 타협이 이뤄졌다고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협상타결후에도 사태진전에 따른 책임을 분담할수 밖에 없다.

개입행위 자체가 사실상 정부를 또 다른 당사자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노동시장의 자율적인 기능을 해친 악선례로 남을 것이라는게 재계의
지적이다.

<> 폭력사태

GM은 두달여간에 걸친 파업과정중에 노사양측간에 폭력이 발생하지 않았다.

힘의 논리로 상대방을 밀어부치는 전근대식 노사행태나 유혈사태는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공권력의 개입도 없었다.

이에따라 GM에서는 협상이 끝난 후에도 노사분규과정에 대한 법적 판단을
놓고 갈등이 발생하지 않았다.

반면 현대자동차의 파업과정에서 일부 노조원들의 폭력이 있었고 공권력과
노조가 정면 대치하는 상황도 나타났었다.

노조원이 일부 사업장을 점거, 출입자를 통제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결국 전경들이 사업장을 봉쇄하는 긴장분위기속에서 협상이 이뤄질 수 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다.

폭력사태의 책임소재를 앞으로 마찰이 재연될 소지가 없지 않다.

노조는 회사측에 대해 고소고발의 철회를 협상의 주요 안건으로 내걸었다.

회사측은 정상조업여부등에 따라 신축적인 대응을 하겠다고 양보했다.

따라서 어렵게 타결된 화합분위기가 다시 깨질 빌미가 생긴 셈이다.

<> 협상태도

GM과 현대는 협상에 임하는 태도와 인식의 폭에도 많은 차이를 보였다.

세계 최대의 자동차 메이커인 GM은 54일간에 걸친 파업을 겪었다.

경쟁사인 포드나 크라이슬러보다 경쟁력이 떨어져 구조개혁이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GM의 노사 모두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율적 협상을 이끌어가는
여유를 보여 줬다.

반면 현대자동차 노사는 서로 막다른 상황에 몰려있는 양측의 처지를
악용, 협상 막판에 가서는 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타협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시간을 끄는 것 자체가 국가신용도를 떨어뜨리는 악재로 작용하는 경제
상황을 빌미로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하려는 "도덕적 해이"도 나타났다.

결국 GM과 현대의 차이는 노사가 조금이라도 양보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였다.

이는 양측 모두를 격렬한 대치상태로 몰고가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노사 모두 경제전체를 고려해 협상을 진행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이래서 나온다.

결국 이같은 어정쩡한 타협은 노사 모두의 승리로 연결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다만 폭발직전에 사태가 수습된게 현실적으로는 최선의 해결책이었다는
정부의 자평이 있을 뿐이다.

< 이심기 기자 sglee@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2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