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타계한 최종현 SK회장(전경련 회장)은 경제이론에 밝고 토론을 좋아
했던 사업가였다.

맏형인 최종건 창업주가 설립한 기업을 이어받아 5위그룹으로 일궈내
재계에선 1.5세로 분류됐다.

93년부터 전경련 회장직을 3연임하면서 창업 1세와 2세들이 혼재했던
변혁기의 재계를 이끌어 왔다.

최 회장은 29년 경기도 수원에서 최학배, 이동대씨의 4남4녀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수원농고 서울대 농대를 거쳐 56년 미국 위스콘신대 화학과를 졸업했다.

59년 시카고대 대학원에서 진학한 그는 경제학 석사학위를 딴 뒤 62년
귀국했다.

최 회장은 원래 칼럼니스트가 되거나 무역업을 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맏형인 최종건씨가 53년 창업한 선경직물이 부도위기에 놓인 것을
보고 이 회사 이사가 돼 경영에 참여했다.

44세때인 지난 73년 최종건 창업주가 폐암으로 갑자기 타계하자 그는
선경의 회장이 됐다.

그는 80년 대한석유공사(구 유공, 현 SK주식회사) 민영화과정에서 삼성그룹
을 제치고 인수에 성공했다.

재계의 파란을 일으키면서 대도약의 기틀을 마련했다.

91년에는 울산에 제2 NCC(나프타분해공장)을 비롯한 유공컴플렉스를 완공해
그룹의 숙원이었던 "석유에서 섬유까지"의 수직계열화에 성공했다.

마침내 94년 7월에는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 인수에 성공해 석유화학과
정보통신이라는 양대 사업축을 완성했다.

최 회장은 문민정부 출범 직전인 93년 2월 유창순 회장의 뒤를 이어
전국경제인연합회회장으로 선임됐다.

97년 2월까지 3기 연속 전경련 회장에 추대됐다.

최 회장은 1.5세로서 복잡하고 다양하게 이해가 엇갈리는 재계의 목소리를
조율하는데 상당한 역량을 발휘했다.

그러나 소신을 그대로 들어낸 일부 발언이 문제돼 정권과의 불편한 관계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었다.

88년 장남 최태원씨가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딸인 노소영씨와 결혼한 것이
세인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기도 했다.

SK 직원들은 최 회장을 "경영기술자"로 기억하고 있다.

최 회장은 평소 기술개발 노력이 우리 기업이 살길임을 강조해 왔다.

그리고 각 계열사 사장에게 권한을 대폭 이양, 계열사별 책임경영체제를
일찌감치 구축했다.

이는 그의 경영철학에 따른 것이다.

그는 지난 70년대말 "60년대는 설비경쟁의 시대였고 앞으로는 경영경쟁의
시대"라며 SK만의 경영시스템인 "선경경영관리체제(SKMS)"를 선포했다.

또 개인 및 조직의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경영도구인 "수펙스(SUPEX)"도
독자적으로 고안해 냈다.

최 회장의 경영철학은 <>인간위주 경영 <>전문경영인제도 지향 <>기술개발을
통한 기업발전 <>사회규범에 맞는 경영활동 등으로 요약된다.

그는 "기업경영에서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며 "사람을 믿고 기르는 것이
기업의 처음이자 마지막 목표"라고 강조했었다.

그가 전문경영인체제를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능력 성실성 인격을 모두 갖추지 않으면 결코 경영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이런 자격을 갖춘 이에게는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기술에 대한 그의 애착은 화학을 전공한 실용주의자로서의 신념이었다.

부존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는 기술개발로 국제경쟁을 이겨내 계속 수출을
확대시켜야 발전할 수 있다고 역설했었다.

그리고 이것을 한국기업가의 사명으로 생각해 왔다.

90년대 들어 재계총리로서 또 국내 5위그룹 총수로서 누구보다 바쁜 삶을
살아 왔지만 최 회장은 누구보다 좋은 건강을 과시해 왔었다.

중고교 시절 축구선수를 지냈고 10년전부터 수련에 심취한 단전호흡이
그 바탕이었다.

실제로 그는 매일 저녁 "조니워커 블랙"을 1병 마시는 호주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뜻밖에 97년 봄 서울대병원에서 폐암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해 6월 미국 뉴욕에서 폐암수술을 받았다.

이 와중에 부인 박계희 여사가 과로로 별세하는 충격을 겪기도 했다.

그가 전경련 회장으로서 공식 행사에 나선건 올 6월17일 김대중 대통령
과의 오찬회동이 마지막이었다.

< 권영설 기자 yskwon@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2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