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람살이가 더 없이 각박하다.

짧은 세월 배부르고 따뜻했던 경험이 새삼 오늘의 삶을 더 그렇게 모나고
차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고 받는 탄식이 예사롭지 않고, 각기 자기 잇속을 차려 부닥치는 비정함이
섬뜩하다.

커다란 다스림의 힘이 온갖 좋은 언어들을 흩뿌리고 있지만 현실은 몽롱한
미궁 속에서 피곤하다.

옳음과 그름이 널뛰듯 하는 판이니 이러한 현실을 겪는 당혹은 아예 무위를
강요한다.

이쯤되면 분노도 일법하고, 무서운 저항도 분출될 듯하고, 아니면 이 상황을
이겨내려는 치열한 결의도 솟을 만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착한 탓일까, 아니면 익숙한 경험법칙에 의해 그러한
몸부림의 불모성을 터득한 탓일까.

세상은 사뭇 잔잔한채 우울한 전망을 예상케 하는 불안만이 감돌 뿐이다.

그러한 분위기 탓인지 서서히 "죽음문화"가 고개를 들고 있다.

죽음을 주제로 한 서적들이 부쩍 늘고 있고, 죽음이 일상의 화제가 되기도
한다.

죽음주제의 주변이라고 할 전생 내세 환생 등에 대한 흥미도 각종 문화매체
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우리가 직면한 불안한 정황이 우리의 죽음의식마저
자극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면 이 현상이야말로 대단히 건강하지 않은
것이다.

사회적 불안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면에서 보면 죽음문화의 조용한 확산은 다행스러울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것이기도 하다.

죽음에 대해 새삼스레 관심을 갖는 것은 삶의 절박한 정황에 처하면서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묻기 시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죽음은 삶의 현실이다.

누구도 죽음에서 예외일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현실로부터 배제하거나 간과하려 한다.

죽음은 절망이고 좌절이고 소멸이라는 두려움이 짙게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물을 교환가치 유무나 그로부터 말미암은 재화적 가치로 판단하며
살아가는 삶 속에서 죽음이란 철저하게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

아무런 생산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예상하지 않거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삶은
의연해지고 활기를 갖게 된다고 생각한다.

죽음문화를 가리고 덮고 버려야 하는 주검처럼 기피해야 할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죽음은 엄연한 삶의 구성요소이다.

죽음은 삶을 완성시키는 극점이다.

죽음은 피하거나 멀리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듬고 귀하게 가꾸어야
하는 구체적인 삶의 내용이다.

삶이 죽음 자리에서 되돌아 보며 다듬을 적에 비로소 그 완연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이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을 응시하고, 죽음을 명상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삶은 가장
성숙한 삶이다.

죽기 전에 삶을 어떻게 보람있는 것으로 매듭지어야 하며, 삶을 어떻게
의미있게 이루어 마침내 죽음이 추하거나, 지저분하거나, 부끄러운 것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사람다운 삶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너무 바쁘게 정신없이 살아왔다.

작은 만족에 빠져 앞도 뒤도 살피지 않는 맹목적인 물의 추구만을 일삼아
왔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만 물화된 생명과 죽음만을 경험하고 수용해 왔다.

그런데 이제 절박한 위기를 만나 불가피하게 삶을 되물을 수밖에 없는
계기에서 우리는 새삼 죽음의 현실성과 만나고 있는 것이다.

무릇 위기는 가벼운 재주부림으로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근원적인 존재론적 성찰을 요하는 과제이다.

오늘 우리의 현실이 죽음문화를 자극한다는 것은 그러한 자리에서 볼 때
우리 삶이 한자리 높은 성숙에 이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차피 죽을 삶인데 가능한 한 착하고, 바르고, 깨끗하고, 추하지 않고,
부끄럽지 않게 죽어야겠다는 다짐이 바야흐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지금의 위기를 외환보유고를 높이는 것 등으로 풀어 마감한다면
우리는 조금도 성숙한 것이 아님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2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