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협의회의 재평가 ]

3공화국 시절 얘기를 시작하기 전에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

민주당 정권 몰락과 함께 사라진 한국경제협의회의 역사적 의미는 꼭
규명돼야 한다.

한국경제협의회는 경제재건촉진회 한국경제인협회 전국경제인연합회 등으로
이름이 바뀐 전경련의 모태이기 때문이다.

61년 1월10일 경제협의회를 창립한 기업인들은 한국 역사에 유례없는 유형의
인물들이었다.

사농공상의 뿌리깊은 전통적 가치를 뒤엎고 공상 주도사회를 이룩하려던
사람들이었다.

경제협의회는 5.16후 해산명령에 의해 4개월이라는 단명의 비운을 맞았다.

그러나 이 짧은 기간에 많은 일들을 했다.

특히 이들이 제시한 구상이나 제안은 5.16쿠데타, 유신체제 등 시대적 풍랑
속에서도 민간 경제계 주류에 의해 면면히 이어졌다.

나는 경제협의회의 창립과 행적이 가히 "기업가 정신혁명"이라고 평가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혁명"인가.

18세기 프랑스혁명에서 1950년대 미국 학계의 주목을 받은 "경영자혁명"까지
혁명은 처음에 보잘 것 없는 불씨로 희미하게 나타나지만 시간과 더불어
위력을 발휘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경제협의회가 당시 해결하고자 했던 과제들 가운데에는 IMF에 구제금융을
받고 있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것들이 적지 않다.

이런 점에서도 경제협의회의 창립정신과 구상은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다.

경제협의회가 기업가정신에 시동을 걸었다는 평가는 어째서 가능한가.

우선 협의회는 4.19후 경제인들이 구국일념의 순수성을 갖고 자발적으로
조직한 단체다.

이들의 목표와 구상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정치에 예속된 위치에서 벗어나 경제를 이끌어갈 주체는 경제인임을 내외에
천명한 것부터가 그랬다.

또 자발적인 조직이었다는 점도 중요한 특징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경제단체인 영국산업총연합회나 일본의 게이단렌 등의
창립은 모두 정부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었다.

그러나 경제협의회는 다원사회원칙에 입각해 기업가들이 자율적으로 만든
단체였다.

이밖에 정치권과의 대등한 관계를 설정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 경제협의회는 "정경유착"의 온갖 비리를 단절하고 투명하고
공정한 정.경관계 확립을 위해 "정치자금 양성화"를 정식으로 제창해 실천에
옮겼다.

한걸음 더 나아가 국가경제운영에 있어 경제계의 참여를 제도화시키기도
했다.

61년 3월24일 반도호텔에서 열린 장면내각 수뇌부와 경제협의회 회장단간
심야회의가 그 효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신용과 윤리를 강조했다는 점이다.

경제협의회 김연수 회장은 장면 총리 앞에서도 "윤리의 뒷받침이 없으면
경제번영은 이룩할 수 없다"고 강조했었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상행위의 근본은 신용이고 신용은 정직한 언행일치로
서만 가꾸어진다고 역설했었다.

김 회장뿐만이 아니다.

당시 대부분 기업인들이 그랬다.

대표적인 이가 개풍상사를 창업한 이정림 회장이다.

그에게서 들은 개성상인 정신은 신용에 관한한 국제적으로 불신을 받고 있는
오늘의 우리 처지에서 볼 때 새삼 그 중요성이 더해진다.

개성상인들은 약속이나 기일을 어기면 그 순간부터 개성상인으로 행세하지
못한다.

장사도 못할 뿐더러 패가망신한다.

그래서 세모가 되면 어떤 일이 있어도 꾼돈에 이자를 얹어 전주를 찾아가
돈을 갚는다.

새해에 다시 돈이 필요하다는 말을 절대 먼저 꺼내지 않는다.

신용을 보여줄 뿐이다.

개성상인의 됨됨이를 아는 전주들은 돈꿔간 자의 성품이 성실하다고
인정되면 새해에 다시 불러 돈을 빌려준다.

오히려 필요한 돈이 없느냐며 더 보태주는 일이 많다.

신용을 지킴으로써 더 큰 신용을 얻는 것이 바로 개성상인들인 셈이다.

경제협의회는 개성상인의 이 "신용본위"정신을 경제계에 정착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경제협의회가 우리 민간경제사에 중요성을 갖는 이유는 또 있다.

선각적인 구상을 했다는 사실이다.

경제협의회는 미래를 내다보고 수출과 외자활용을 통한 경제발전이라는
구상을 제시했다.

이는 2공화국에 의해 원칙적으로 채택됐고 5.16후 3~4년 시행착오끝에
국가정책으로 채택된다.

그러나 한국경제협의회는 이런 평가는 고사하고 그 존재에 대해서도 잊혀진
것 같아 나로선 안타까울 뿐이다.

오히려 일부 학계 인사들은 박정희정권이 민주당 정권을 부패정권으로
몰아붙였던 도식에 젖어 경제협의회에 대해서도 정경유착을 노린 이익집단
으로 매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말하면 이는 추측, 아니 억측에 불과하다.

경제협의회 4개월간의 각종 기록 어디에서도 이익단체 주장은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순수한 구국의지만을 발견할 수 있다.

필자는 61년 3월18일 채택한 "절량농가 구호금품 거출요강"을 소개하고
싶다.

곡식이 떨어진 시골 국민들에게 구호양곡을 마련할 때 만든 원칙이다.

"절량민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줄 소맥부대에는 상표를 인입치 않고..."라는
문장이 눈에 띈다.

돈을 낸 회사의 선전은 절대 하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세계적 시야에서 국가경제를 다룬 단체였다.

회원사나 업계의 이익은 안중에 없었다.

경제협의회가 어떤 시련을 겪는지, 그리고 70년대 전경련을 통해 어떻게
한국 기업가 정신혁명으로 구체화되는지 앞으로 차차 살펴보자.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3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