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오탁번은 인도 캘커타에서 테레사수녀를 만난 순간을 이렇게 적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천상의 신이 내앞에 강림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맨발이었고 얼굴과 손에 굵은 주름살이 패여 있었다.

무심과 무욕으로 가장 숭고한 평화를 맞이하고 있는 주름진 얼굴을 대했을
때 나는 잿빛 처마끝 이엉에서 떨어지는, 눈도 못뜬 벌레처럼 나약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살아있는 성녀" "빈민들의 어머니"로 불리던 테레사수녀는 1901년 유고의
스코프에서 태어났다.

18세때 수녀원에 들어가 28년 캘커타 성아그네스고교의 지리교사로
파송됐다.

44년 교장이 됐으나 48년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게 보다 값진 나의 할 일"
이라며 학교를 떠나 죽을 때까지 헐벗은 이들과 함께 살았다.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선 가난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부자들은 항상 무엇인가 더 필요로 하며 이때문에 외롭다고 말했다.

아울러 가난과 굶주림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슬픈 게 아니라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치지 않는 인심이 가슴아프다고 얘기했다.

가난보다 해결하기 어려운 건 사랑결핍이라는 말도 자주 했다.

81년 처음 내한했을 때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벗어나 가난한 사람들을
돕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며 각자 맡은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성직자와 수도자는 직책수행을 목표로 할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을 통해 보여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오는 5일 테레사수녀의 1주기를 앞두고 로마 교황청에서 성인 추대를
검토한다는 소식이다.

시성 절차는 결정의 객관성때문에 사후 1백년정도 걸리는게 보통이지만
테레사수녀의 경우엔 2002년께면 시작되리라 한다.

우리 사회엔 자선이라는 이름 아래 매명에 더 힘쓰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자기자식에겐 보다 좋은 간판과 풍요로운 삶을 마련해
주려 애쓴다.

이들에게 테레사수녀가 오탁번 시인에게 써준 글귀는 어떤 울림으로
다가올까.

"침묵의 열매는 기도, 기도의 열매는 믿음, 믿음의 열매는 사랑, 사랑의
열매는 봉사, 봉사의 열매는 평화"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