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민 < 본사 논설실장 >

"내가 제갈량과 같은 이를 천거할테니 그대는 임금께 여쭈어 유비처럼
삼고초려의 예를 차리도록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렵다"

"조선에 머물고 있는 명나라 장병들에게 종실의 딸들을 시집보내고 김류
따위의 집을 징발해서 살림을 차려줄 수 있겠는가"

"그 또한 어렵다"

대추 밤 감 배 등 제삿상에 오를 과일이나 망건을 만드는데 쓰는 말총을
독점하거나 무인도를 개간하는 등으로 몇년새 백만금을 번 기인 허생이
북벌을 꿈꿨던 효종의 총신 이완과 주고받는 말이다.

그들의 대화는 이어진다.

"양반집 아들들에게 머리를 깎게하고 되놈의 옷을 입혀 저들나라에 보내
허실을 정탐케하고, 멀리 강남에도 보내 명나라 유신들과 뜻을 통하도록하는
방안은 어떻겠는가"

"삼가 예법을 지키는 사대부집 아들들이 누가 머리를 깎고 되놈의 옷을
입겠는가"

이광수의 소설 허생전의 원전이라고할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옥갑야화에
나오는 허생과 이완의 대화, 그것은 매우 흥미롭다.

이것은 이래서 곤란하고 저것은 저래서 안된다는 말은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예나 지금이나 하는 소리라는걸 새삼 되새기게 하기 때문이다.

결코 그들을 비난하려는 뜻에서 하는 얘기만은 아니다.

언제나 현실은 그렇게 걸리는게 많게 마련이고, 특히 경제는 그래서
어렵다는 점을 다시한번 생각할 뿐이다.

결국 유찰로 처리된 기아자동차문제만해도 그렇다.

과연 그런 조건으로 팔릴가 의심스럽더니, 아니나 다를가 4개 참가업체
모두 부채탕감을 조건으로 달아 입찰은 하나마나한 꼴로 끝냈다.

자산(7조7천억원)보다 5조1천억원이나 많은 12조8천억원의 빚을 안고 있는
기아.아시아자동차를 부채탕감없이 살 기업이 있을 지, 설혹 살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매출 7조5천억원짜리 회사가 그런 빚덩이위에서 정상화될 수 있을
지는 애당초 의문이었다.

그런데도 산은, 좀더 정확히 말해서 정부가 대출 원금은 전혀 탕감치않고
2~5년거치에 연6~10.5%금리를 조건으로 기아를 입찰에 붙인 까닭은 뭘가.

그 배경은 따지고보면 간단하다.

말썽 많고 골치 아픈 특혜시비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몸조심때문이었다고
한다면 틀린 말인가.

대폭 빚을 털어줘야 팔리고 정상화될 수 있으리란 것이나, 세계적인 추세인
자동차업체 대형화에 걸맞게 경쟁력있는 자동차산업구도를 가져가려면
국제입찰이 반드시 최선일 수 없다는 것은 관계당국자들이 생각하지
않았을리가 없다.

정책은 결국 가치에 대한 판단이고 선택이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특혜시비가 빚어져선 안된다는 판단도 꼭 비난받아야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기아입찰이 2차 3차까지가고 그 정리결과가 경쟁력확보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하더라도 그렇다.

이른바 투명성확보가 정책당국자들이 추구하는 지고하고 전선한 가치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것이 국민경제를 위해 정말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을 갖춘 정책
판단이고 선택일 수 없다는 것도 자명하다.

그 속성상 명분에 경도될 수 밖에 없는 야에서 오래 생활한 경우 특혜
(경제력집중)시비에 대해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이는 것은 보통이다.

그러나 정책당국자의 경제관이 대학강단에 있을때나 평론가의 입장에
있을 때와 똑같아서는 곤란하다.

경제가 어렵고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사안일수록 정책당국자의 선택은
고통울 것이다..

이쪽을 보면 이래서 안되겠고 저쪽을 보면 저래서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
것이니까.

정리해고를 제도화하고 실제로는 그 작동을 가로막은 것도 어쩌면 그런
까닭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결국 탕감해줄게 뻔한 부채를 덜어주지않겠다고 나선 것도 따지고보면
관념과 현실간 선택이 쉽지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어쨌든 선택이 불분명한 정책은 금물이다.

그 반증이 정리해고의 표류고 시간만 축내고 결국 비용만 늘어나게된
기아처리다.

좀더 소신있는 정책당국자.

현실감있고 선택이 분명한 정책이 정말 긴요한 시점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