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난 주 발표한 경기대책의 주요골자는 통화확대, 은행구조조정자금
조기지원 및 세금감면이다.

공식적으로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폴 크루그먼 교수의 인플레이션 정책과
궤를 같이 하는 발상이다.

이는 그동안 논의돼 왔던 "경기활성화론 대 구조조정론"의 대결에서 일단
경기활성화론이 판정승한 것을 의미한다.

수술대에 오른 환자에게는 수혈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작용한 결과이다.

경기활성화론이 승리하게 된 배경에는 관련 경제주체들의 이해가 맞아
떨어진 측면이 있다.

먼저 기업과 은행은 신용경색 해소와 내수진작책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정부는 정부대로 구조조정이 늦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경기침체에 대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일반 국민들 역시 자산가치 하락이 저지되고, 실업난이 해소될 수 있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유독 반대 입장을 고수하던 한국은행마저 무릎을 꿇은 지금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모두가 승리하는 윈-윈 정책인 셈이다.

그렇다면 왜 진작 이러한 처방을 쓰지 않았던가.

지금까지 경기활성화론이 자리잡지 못했던 것은 구조조정이 가지고 있던
당위성 때문이었다.

우리경제가 가급적 단시간에 최대한 성공적으로 경제개혁을 수행해야
한다는데 이견을 단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정부의 조치는 구조조정에 대해서는 마이너스 효과를 줄
것이다.

무엇보다 구조조정에 대한 경제주체들의 인식이 바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제주체들 사이에서는 이제 개혁이 늦춰지더라도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는 의식이 만연돼 있다.

일단 결정된 정책을 변경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제라도 최대한 좋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보완조치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 은행들의 대출이 과거처럼 대기업 위주로 편중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정부 계획대로 금년내 은행에 50조원이 지원되면 일단 은행들의 BIS자기자본
비율이 향상될 것이고 따라서 은행들의 대출여력이 늘어날 것이다.

과거의 대출관행이 재연되는 것을 막기위해 기업의 자기자본 비율과 대출을
자동적으로 연계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대출기준의 투명성을 제고하고 자의성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기업들이 투자를 안하고 있는 것이 과연 자금부족때문이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투자가 전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잉여생산능력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출과 내수 전망이 극히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의 투자의욕을 북돋울 수 있는 추가적인 장치가 필요하다.

셋째, 구조조정 작업을 가속화하는 노력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특히 한보와 같은 법정관리 기업들에 대한 처리기준을 신속히 마련하여야
할 것이다.

한보문제는 지난 8월28일 IMF 이사회에서 지적한 한국경제의 주요 문제점
중 하나이다.

10년 가까이 경기도 활성화시키지 못하고 구조조정도 이룩하지 못한 일본은
우리에게 좋은 반면교사다.

일본은 과감하게 구조조정하는 타이밍을 상실하여 결과적으로 어느 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폴 크루그먼 교수의 인플레이션 정책을 일본이 나름대로 소화하여 개발한
조절인플레이션 정책이 있다.

일본은행이 인위적으로 물가를 상향통제하여 디플레이션 악순환을 방지하고,
금융기관의 불량채권을 원할히 처리할 수 있는 방안이라는 것이다.

마이니치 신문은 지난 7월 이러한 논의에 대해 인플레이션 통제력 상실,
엔화 약세 및 구조개혁 지연이라는 부작용을 지적하고 이같은 발상을 "악마의
유혹"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수술이 반드시 필요한 정도의 중환자는 아무리 많은 수혈을 하더라도 환부를
도려내지 않고는 결코 병을 치유하지 못한다.

강태진 < 외이즈 디베이스 이사/경제박사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