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무대로 살아가는 이들의 동병상린 때문이었을까.
파일럿들의 모임인 ABC(Airline Business Club)회는 오랜세월 흔들리지
않고 오늘까지 모임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 76년 어느 무더웠던 여름날-.
서울 광화문 뒷골목의 한 주막에 젊은 파일럿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우정과 사랑, 세계의 하늘에 펼칠 꿈들을 키우기 위해 ABC회를 만들자고
결의했다.
시대와 장소만 다르지 "도원결의" 다름 아니었다.
항공계를 이끌어 갈 같은 또래의 진지한 논의는 시간가는줄 모르고 계속
됐다.
주막주인이 통금시간을 알리지 않았더라면 "광화문결의"는 파출소로
이어졌을 것이다.
당시 주인공들은 독일항공의 윤광웅, 호주항공의 이주로, 캐세이퍼시픽항공
의 한종구, 타이항공의 이춘수, 영국항공의 최한호, TWA의 필자 등이었다.
다른 항공사에 근무하면서도 "적과의 동침"을 이렇듯 예사롭게 여긴 것은
남다른 우정 때문이었다.
우리들은 한달에 한번꼴로 공식 "점심모임", 대포가 곁들여지는 "저녁모임",
계절따라 부부동반으로 하는 북한산 도봉산 "산행" 등등.
참 많이도 만났다.
2천만원을 모아 마련한 콘도에서는 밤새워 정담을 나눴고 송년모임은
우정의 축적장이 됐다.
우정은 곧 타인에 대한 사랑과 배려로 발전했다.
불우노인들을 위한 자선단체인 노인복지회와 20년 가까이 인연을 맺으며
도움을 주고 있다.
어느덧 로맨스그레이가 돼 버린 회원들-
그러나 하늘을 무대로 젊음을 불태웠던 지난날은 결코 허허롭지 않다.
한달 한번뿐의 "점심모임"이 벌써 2백70회를 넘어섰다.
내친김에 5백회까지의 만남을 욕심내본다.
늘어가는 흰머리카락, 하나 둘 주름져 가는 넉넉한 얼굴들의 웃음속에
우정은 영원할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1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