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부처들이 바쁘다.

금융과 기업구조조정이 한창 진행중인데다 경기마저 바닥이다.

국제금융시장 불안도 여전하고 수출마저 줄고 있어 더욱 눈코 뜰새 없다.

나라경제가 비상이니만큼 재정경제부나 산업자원부 금융감독위원회 등
주요 경제부처들은 장관부터 사무관까지 휴일을 잊은지 오래다.

요즘에는 일이 하나 더 늘었다.

시도 때도 없이 열리는 각종 비공식회의 자료를 챙기고 보고서를 만드는
일이다.

매주마다 열리는 경제장관간담회나 국무회의 등은 정례적인 일이라고 치자.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열리는 주요 경제장관 간담회나 청와대 보고까지
합치면 2-3일에 한번꼴로 경제부처에선 장관급 회의가 열린다.

이규성 재경부장관은 지난 3월 임명된 이후 현재까지 모두 60회가 넘는
비공식적 경제장관 모임을 주재했다.

해외출장 기간 30일 가량을 빼면 3일 건너 한번꼴로 비공식 회의를 한
셈이다.

이때마다 실무자들은 회의 자료를 만들고 또 결과 보고서 까지 작성해야
한다.

또 이 장관은 매주 수요일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주례보고를 따로
한다.

이땐 실무자들은 보고서에 더욱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오탈자라도 있을 때는 면목이 안선다.

특별한 보고내용이 없더라도 제목을 바꾸고 구성을 잘하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직접 페이퍼워크(서류작성)를 하는 실무자들은 요즘 "죽을 맛"이다.

매일 매일 새로운 정책이 개발되는 것도 아닌데 자료는 일단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각종 보고서의 함량이 떨어지는건 당연하다.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을 업데이트하는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정부의 경제행정이 "탁상공론이 아니냐"는 소리도 이래서 나온다.

"경제정책은 현장감이 중요한데 하루 종일 보고서를 작성에만 매달리니
문제가 생긴다"(경제부처 L과장)는 얘기다.

여기에 아직까지 자리잡고 있는 공직사회의 경직성도 페이퍼를 양산하는
주범이다.

과거 관례상 해왔던 일은 도무지 버리지 않는다.

일상적인 동향보고는 물론 엇비슷한 회의 자료를 만들면서 시간을 보낸다.

경제부처 한 사무관은 "민간부문에서 일어난 시시콜콜한 일까지도 보고
자료를 만들어야 한다"며 "정책개발을 주도한다기 보다는 벌어지는 상황을
뒤따라가는 역할에 그치고 있다"고 토로했다.

< 김준현 기자 kimj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1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