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곰취와 비비추 .. 정진규 <한국시인협회장>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글은 있으되 글이 없다, 문자는 있으되 문자가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를테면 비 개인 아침 한마리 하얀 새가 푸른 산 허리를 베고 나는 것과
같은 싱싱한 자안의 그것이 없다는 것이다.
"서권기 문자향"의 그윽한 멋과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런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리라.
너무 갑갑하다.
그러나 나는 최근 운좋게도 살아 눈 뜨고 있는 서로 다른 사람의 육필 편지
두 통을 받았다.
나를 열어준 너무 소중한 편지들이다.
요즘 세상에 편지라는 것 자체가 기껏해야 컴퓨터로 찍어 프린트한 것이
고작이거나 청첩장 형식의 것 말고는 거의 없어져가고 있는 형편에 눈이
번쩍 뜨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편지들은 돋아오르는 마음의 초록 이파리가 말씀보다는 그것 자체로
거기 자리하고 있어 혼자서만 간직하기엔 너무 아깝게 여겨졌다.
다음에 그 모습을 그대로 옮긴다.
"보내드리는 씨는 곰취라고 합니다.
곰취는 해발 8백m이상 높은 곳에만 자라는 식물로 곰이 뜯어 먹는다는
나물입니다.
옛날에는 임금님께 올렸던 나물이라고 합니다.
무쳐 먹어도 향기가 좋고 상추 대신 고기를 싸서 먹으면 맛이 있다고
합니다.
워낙 높은 곳에 있다보니 지리산 주변에서도 보기가 힘들고 재배도 하지
않는데 지금쯤 화분에 심어 놓으면 빠른 것은 한달쯤 뒤에, 늦은 것은 내년
봄에 싹이 나옵니다.
꽃은 쑥부쟁이(들국화) 크기정도로 노랗게 피는데 2,3년 키웠지만 아직
꽃을 피워 보지는 못했습니다.
다년생이기 때문에 그 해 잎이 마르면서 겨울 싹이 많이 나와 이듬해
봄부터 왕성하게 자라납니다.
심으실 때 거름을 넣지 말고 심으시기 바랍니다.
거름을 넣고 심으면 거름에서 나오는 열로 인해 씨앗이 썩게 됩니다.
가는 모래에 심고 건조하지 않도록 물을 주셔서 습기를 유지해 주면 싹이
잘 나오고 추위에도 강하기 때문에 베란다에 두시면 됩니다"
이 편지는 바로 그 곰취 씨앗이 든 봉투와 함께 내게 보내준 한 시골
젊은이의 편지다.
그는 진주의 한 대학에서 현대문학을 강의하고 있는 아주 건실한 사람이다.
자신의 지식을 내세우거나 과장하지 않는 바로 곰취같은 사람이다.
그런 향과 기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얼마나 누린내가 넘치는 세상인가.
어느 골목을 걸어가도 된장국 내음보다는 고기 굽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다.
때로 허기지면 고기가 먹고 싶기도 하겠지만 역할 때가 더 많다.
"나물로 무쳐 먹어도 향기가 좋고 상추 대신 고기를 싸서 먹으면 맛이
있다고 합니다"라고 그는 쓰고 있지 않는가.
그 "맛"이 무엇인가.
무릇 맛에는 "향"이 있어야 하고 "기"가 있어야 몸에도 좋고 마음에도 좋을
수가 있는 법이다.
마음과 몸을 키우는 맛이 진짜 맛이다.
요즘 세상에 쏟아져 나오는 책들에서는 그런 맛을 볼 수가 없다.
고기 굽는 누린내가 너무 진동을 하고 있다.
그건 욕망의 냄새이며 허세의 냄새다.
나는 이 편지의 여백에, 그 하얀 여백에 "회사후소"의 심정으로 다음과
같이 몇줄을 적어 두었다.
"우리집에 곰취씨가 입주하다.
우리집에 곰취씨가 심어지다.
우리집이 곰취새댁의 씨방이 되다.
마음의 바알간 등불 하나 걸리다"
또 한 통의 편지인즉 말린 보라색 비비추꽃을 동봉한 것으로 다음과 같이
시작된 내용의 것이다.
"이 꽃 이름은 비비추입니다.
자주 열어보시는 책 속에 넣어 두시면 얼핏 시선이 맑아지실 것입니다.
책은 노상 정신을 몰입시키는 것이어서 자연히 긴장으로 빠지게 되는데
엄지손으로 페이지를 훑어 넘길 때 풀꽃 하나가 웃어주는 청량감!
바로 그것이 머리를 시원하게 합니다"
이 편지는 "어감도 예쁘지요. 비비추. 순수한 우리말이고 선도 아주 단아
합니다. 난초가 사대부가의 여인이라면 비비추는 저 혼자의 힘으로 자기를
다듬어 피우는 시골 아낙의 그것일 것입니다"라고 끝내고 있다.
"곰취"와 "비비추", 우연치 않게도 서로 다른 사람이 보내준 편지에 살아
눈뜨고 있는 생명의 실체가 담겨 있다니.
이걸 갑갑한 세상 분네들께 드리고 싶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12일자 ).
이를테면 비 개인 아침 한마리 하얀 새가 푸른 산 허리를 베고 나는 것과
같은 싱싱한 자안의 그것이 없다는 것이다.
"서권기 문자향"의 그윽한 멋과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런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리라.
너무 갑갑하다.
그러나 나는 최근 운좋게도 살아 눈 뜨고 있는 서로 다른 사람의 육필 편지
두 통을 받았다.
나를 열어준 너무 소중한 편지들이다.
요즘 세상에 편지라는 것 자체가 기껏해야 컴퓨터로 찍어 프린트한 것이
고작이거나 청첩장 형식의 것 말고는 거의 없어져가고 있는 형편에 눈이
번쩍 뜨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편지들은 돋아오르는 마음의 초록 이파리가 말씀보다는 그것 자체로
거기 자리하고 있어 혼자서만 간직하기엔 너무 아깝게 여겨졌다.
다음에 그 모습을 그대로 옮긴다.
"보내드리는 씨는 곰취라고 합니다.
곰취는 해발 8백m이상 높은 곳에만 자라는 식물로 곰이 뜯어 먹는다는
나물입니다.
옛날에는 임금님께 올렸던 나물이라고 합니다.
무쳐 먹어도 향기가 좋고 상추 대신 고기를 싸서 먹으면 맛이 있다고
합니다.
워낙 높은 곳에 있다보니 지리산 주변에서도 보기가 힘들고 재배도 하지
않는데 지금쯤 화분에 심어 놓으면 빠른 것은 한달쯤 뒤에, 늦은 것은 내년
봄에 싹이 나옵니다.
꽃은 쑥부쟁이(들국화) 크기정도로 노랗게 피는데 2,3년 키웠지만 아직
꽃을 피워 보지는 못했습니다.
다년생이기 때문에 그 해 잎이 마르면서 겨울 싹이 많이 나와 이듬해
봄부터 왕성하게 자라납니다.
심으실 때 거름을 넣지 말고 심으시기 바랍니다.
거름을 넣고 심으면 거름에서 나오는 열로 인해 씨앗이 썩게 됩니다.
가는 모래에 심고 건조하지 않도록 물을 주셔서 습기를 유지해 주면 싹이
잘 나오고 추위에도 강하기 때문에 베란다에 두시면 됩니다"
이 편지는 바로 그 곰취 씨앗이 든 봉투와 함께 내게 보내준 한 시골
젊은이의 편지다.
그는 진주의 한 대학에서 현대문학을 강의하고 있는 아주 건실한 사람이다.
자신의 지식을 내세우거나 과장하지 않는 바로 곰취같은 사람이다.
그런 향과 기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얼마나 누린내가 넘치는 세상인가.
어느 골목을 걸어가도 된장국 내음보다는 고기 굽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다.
때로 허기지면 고기가 먹고 싶기도 하겠지만 역할 때가 더 많다.
"나물로 무쳐 먹어도 향기가 좋고 상추 대신 고기를 싸서 먹으면 맛이
있다고 합니다"라고 그는 쓰고 있지 않는가.
그 "맛"이 무엇인가.
무릇 맛에는 "향"이 있어야 하고 "기"가 있어야 몸에도 좋고 마음에도 좋을
수가 있는 법이다.
마음과 몸을 키우는 맛이 진짜 맛이다.
요즘 세상에 쏟아져 나오는 책들에서는 그런 맛을 볼 수가 없다.
고기 굽는 누린내가 너무 진동을 하고 있다.
그건 욕망의 냄새이며 허세의 냄새다.
나는 이 편지의 여백에, 그 하얀 여백에 "회사후소"의 심정으로 다음과
같이 몇줄을 적어 두었다.
"우리집에 곰취씨가 입주하다.
우리집에 곰취씨가 심어지다.
우리집이 곰취새댁의 씨방이 되다.
마음의 바알간 등불 하나 걸리다"
또 한 통의 편지인즉 말린 보라색 비비추꽃을 동봉한 것으로 다음과 같이
시작된 내용의 것이다.
"이 꽃 이름은 비비추입니다.
자주 열어보시는 책 속에 넣어 두시면 얼핏 시선이 맑아지실 것입니다.
책은 노상 정신을 몰입시키는 것이어서 자연히 긴장으로 빠지게 되는데
엄지손으로 페이지를 훑어 넘길 때 풀꽃 하나가 웃어주는 청량감!
바로 그것이 머리를 시원하게 합니다"
이 편지는 "어감도 예쁘지요. 비비추. 순수한 우리말이고 선도 아주 단아
합니다. 난초가 사대부가의 여인이라면 비비추는 저 혼자의 힘으로 자기를
다듬어 피우는 시골 아낙의 그것일 것입니다"라고 끝내고 있다.
"곰취"와 "비비추", 우연치 않게도 서로 다른 사람이 보내준 편지에 살아
눈뜨고 있는 생명의 실체가 담겨 있다니.
이걸 갑갑한 세상 분네들께 드리고 싶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1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