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아시아에서 시작된 금융위기의 여파가 수그러질 기미없이 러시아로,
중남미로, 동유럽으로 확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위기가 계속 확산될 경우 서유럽은 물론 냉전후 유일 초강국으로
부상한 미국도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으로 진단하고 있다.

이러한 공황론 또는 세계적 경기침체론은 1920년대의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시도 지금과 같이 급격한 글로벌리제이션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일국의 경기불황이 전세계로 파급됐다.

차이점이 있다면 과거에는 세계경제의 중심지에서 파문이 시작됐으나 지금은
주변에서 시작해 점차 영향권이 넓어지고 있다는 사실 정도다.

물론 20년대 대공황의 결과로 그러한 위험성을 억제할 수 있는 일국단위
또는 국제적인 규모의 많은 정책수단과 장치들이 개발돼 있어 역사가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이같은 논의들은 모두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시나리오로 각국 정치
지도자들로 하여금 적절한 대비책을 모색케 하는 순기능을 하고 있다.

아울러 불안한 미래전망은 경제주체들의 비관적인 행동을 유발, 실제로
부정적인 전망쪽으로 상황이 전개되도록 하는 역기능적 요소도 내포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전망은 한편으로 쉽지만 다른 한편으로 신중을 기해야 하는
영역이다.

최근의 다양한 시나리오들은 세계 정치지도자들의 조정 역할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데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주요 국가들의 정치지도자들이 개별국가 차원의 이해득실을 떠나 보편적인
신질서를 모색하는 책임있는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경제의 위기양상은 국제적 협력활동의 부재 혹은 부조화에
상당부분 기인하는 현상이다.

특히 냉전이후 새로운 세계경제질서의 확립 과정에서 선진국들의 리더십
역할 및 협력 부재가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IMF와 미국은 아시아위기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일본의 희생적인 역할을
강요해 왔다.

이에 일본을 비롯한 일부 국가들은 미국이 보다 책임있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 각국은 누군가의 조정역할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면서도
개별 이해관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공멸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1920년대 말 대공황의 중요한 요인은 국제적인 정책 협조의 부재에 있었다.

19세기 말 세계정치의 균형자였던 영국이 1차대전을 계기로 영향력을
상실하고 신흥국가들의 이기적인 정책들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공황이라는
파국이 왔다.

당시 대자본가(haute finance)들은 이기적인 자본축적을 목표로 세계경제의
통합을 촉진시키고 기성 질서를 파괴하고 다녔다.

오늘날의 상황을 다시 보자.

냉전 이후 세계화가 촉진되고 새로운 국제적 협력 레짐(regime)의 창출이
필요한 시점에서 세계경제 불안은 날로 심화되고 있다.

IMF의 역할은 위기확산 및 심화를 예방하기 보다 사후수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환투기세력은 주권국가들을 농락하고 있다.

국제사회는 세계화의 충격에 적응할 새로운 제도(institution) 혹은 기제의
창출을 적극적으로 논의해야 할 때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선진국 리더들의 정책 협조를 기대하기가 쉽지 않은
분위기로 가고 있다.

클린턴 대통령은 성추문과 대선자금 스캔들에 휩싸여 있고, 일본의 오부치
총리는 국내경제를 추스르기에 숨가쁜 입장이다.

독일의 콜 총리 역시 선거패배 가능성 때문에 정신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진국 정치지도자들의 협력을 강력히 촉구해야
한다.

그들에게 제시할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가령 세계경제통합으로 인해 지구촌의 국지적인 위기가 선진국 경제에
급전파된다는 인식을 근거로 선진국 리더들에게 새로운 위기방지 기제, 즉
금융불안 조짐을 조기에 감지하고 개입할 수 있는 독립적인 기구의 설립을
촉구해 볼 수 있다.

이 기구는 위기예방의 궁극적인 수혜자가 될 선진국들 간의 정책협조와
재원 갹출이 필수 요건이며 금융불안의 조기진단과 치유, 그리고 환투기
세력에 대한 효과적인 위협수단 마련을 목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세계경제의 위기 시나리오에서 "리더십의 동요"와 그에 따른 "대안모색
노력의 결여"는 우리의 미래 운명을 좌우할 중요한 변수다.

세계화의 충격이 가시화되는 시점에서 우리가 주도적으로 국제사회에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는 일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송하영 < 와이즈 디베이스 수석연구위원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1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