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스펀 미 연준리(FRB)의장이 4일 금리인하 가능성을 시사하자 미 증시는
8일 폭등세를 보였다.

이는 그린스펀이 최후의 조정자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클린턴 대통령, 콜 총리 등 그동안 세계경제의 구심점 역할을 해 온
인사들의 정치적 장래가 불투명해지면서 그 영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린스펀의 막강한 영향력이 결코 한사람의
천재적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에는 공개시장위원회(FOMC)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조직 외에 "증시붕괴
방지팀"(Plunge Protection Team)이라는 비공개조직이 재무부내에 있다.

이 팀은 87년 증시 폭락과 같은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으로
팀장은 루빈 미 재무장관이며 팀원으로는 연준리 의장 외에 연방증권관리
위원회(SEC) 및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위원장이 있다.

이들은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NEC), 뉴욕연방준비은행과의 긴밀한 협조하에
"증시감시시스템"(MSS)을 상설적으로 가동하며 "레드 북"이라고 불리는 위기
상황에 대비한 "비상플랜"을 갖고 있다.

주식거래를 중단시키는 서키트 브레이크, 통화량 증가, 금리 인하, 증시
개입 등이 대표적인 비상조치로 알려져 있다.

그린스펀의 발언이 시장에 엄청난 영향력을 갖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기관들이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미 정책 당국이 비상시에는 직접적인 시장개입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미 재무부가 4백억 달러 규모의 환율안정기금(ESF)을 사용해 은밀한
형태로 증시에 개입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앵글로색슨 자본주의의 균열이 드러나는 지점이며 여전히 국가나
정부의 역할이 중요함을 반증하는 사례이다.

우리의 형편을 살펴보자.

IMF 체제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국제금융질서의 새로운 재편이 모색되고
있고 99년 세계경제 전망에 대한 회의론이 확산되면서 외부환경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 정부가 비상사태에 대비한 플랜을 갖고 있는 지는
의문이다.

미국과 유사한 체제를 갖추고 있을 지는 몰라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7일자로 재경부가 배포한 "최근의 경제동향"이 그 증거이다.

아무리 살펴봐도 미국이 금리를 인하해야 한다는 당위론 만이 있을 뿐
과연 미국이 금리를 인하할 지, 인하한다면 그 시기는 언제일 것이며 파급
효과는 어떻게 되는 지에 대한 내용은 거의 전무하다.

월가 금융기관의 보고서에도 훨씬 못미친다.

미 금리인하 여부 외에도 10월 투기자본의 홍콩달러화 공격설, 외환규제
이후 말레이시아의 향방, 일본 조기총선 가능성 등 우리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칠 외부요인은 산적해 있다.

당장 미국처럼 이상적인 위기관리체제를 갖출 수는 없겠지만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예상 시나리오와 그에 따른 대책을 수립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만 한다.

예상한대로 미래가 전개되지는 않겠지만 아무런 플랜없이 돌발변수에 봉착할
경우에는 정책상의 오류를 범할 우려가 높기 때문이다.

한국판 "레드 북"의 탄생을 기대한다.

김성택 < 와이즈 디베이스 책임연구위원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1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