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프로] (9) 제1부 : <8> '웹마스터' .. 서홍원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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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Q(지능지수) 1백55에 경기과학고 2년만에 졸업.
과학기술대 기계학 학사및 석사.
이 약력의 주인공은 인터넷 서비스업체 아이네트의 웹마스터인 서홍원(27)
서버운영팀장이다.
누가봐도 분명 수재다.
그러나 대학이후 학점을 들여다보면 이런 화려한 이력이 무색해진다.
학부 2.8, 대학원 2.2의 학점.
중하위권 성적이다.
대학 2학년때는 학사경고까지 받았다.
수재가 갑자기 지진아로 전락(?)한 이유는 뭘까.
주범은 바로 인터넷이었다.
서팀장이 처음 인터넷을 접한 것은 학사경고를 받던 89년.
일반인들은 "인터넷"이 뭔지조차 모르던 시절이었다.
과기대의 첨단설비 덕분에 그는 일찌감치 컴퓨터를 배웠다.
그러던중 우연히 인터넷에 접속하게 됐다.
그때부터 그는 수업 빠지길 밥먹듯 했다.
컴퓨터앞에서 밤새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하루 평균 7~8시간은 인터넷에 매달렸다.
그를 정신없게 만든 인터넷의 매력은 수재 공학도 답지않게 "채팅"이었다.
수만리 떨어져 있는 미국사람과 옆집 친구대하듯 대화할수 있다는게 너무나
신기했단다.
그의 인터넷 인생은 이렇게 "재미"로 출발했다.
국내 최고의 인터넷 전문가가 되겠다는 거창한 꿈은 없었다.
채팅을 좀더 편하게, 포르노사이트를 효율적으로, 인터넷 구석구석을 좀더
샅샅이 뒤져보자는 원초적 필요성 때문에 그는 인터넷에 빠져들었다.
"여행을 좋아하면 많은 곳을 다니기 위해 운전을 배우듯이, 인터넷을 즐기기
위해서는 관련기술을 터득할 수밖에 없었죠"
그는 인터넷마니아가 된 동기를 이렇게 비유했다.
그는 곧 인터넷 마니아들사이에서 유명인사가 돼 버렸다.
메일링 리스트를 첫 소개하는 등 국내 인터넷 개척자 역할을 톡톡히 했기
때문이다.
93년에는 개인 홈페이지도 만들었다.
대학원을 졸업하던 95년.
그는 국내 최초의 인터넷서비스 업체 아이네트의 웹마스터로 스카우트됐다.
서팀장은 전문가들사이에서 국내 최고수준의 웹마스터로 꼽힌다.
그가 95년초 만든 아이네트 홈페이지는 많은 웹마스터들에게 교과서였다.
미국 유력 인터넷 잡지인 넷가이드의 "골드사이트"로 선정되는 등
국내외에서 상도 많이 받았다.
인터넷을 통해 소리를 들을수 있도록 하는 소프트웨어인 "리얼오디오"도입,
홈페이지상에 "인터넷 노래방"개설, 인터넷 생중계 실시.
모두 그가 세운 국내최초 기록들이다.
그러나 정작 그는 "나는 웹마스터가 아니다"고 주장한다.
웹마스터가 되기까지 절반쯤왔을 뿐이란다.
그만큼 프로정신이 투철하다.
웹마스터는 제너럴리스트여야 한다.
기술적 지식도 중요하지만 기획력, 미적 감각, 때로는 엔터테이너로서의
기질도 필요하다.
시사상식도 빼놓을수 없다.
이런 자질을 위해 그는 즐겨보는게 세가지 있다.
첫째 다큐멘터리 영화.
여기서 그는 과장없이 순수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감동을 주는
다큐멘터리의 리얼리즘을 배운다.
둘째 만화영화.
무엇보다 재밌어서다.
그는 여기서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얻는다.
마지막으로 세상 돌아가는 일을 놓치지 않기 위해 신문과 사사잡지를 챙겨
읽는다.
최근에는 회계책도 보기 시작했다.
기업의 이미지를 관리하는 일인만큼 경영에 대한 지식도 있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떤게 좋은 홈페이지냐는 질문에 그는 "계곡에서 흐르는 물같아야 한다"고
답한다.
늘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순간도 똑같지 않은 계곡물.
홈페이지도 전체적인 이미지는 같지만 접속할마다 새로운 흐름을 제공할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훌륭한 웹마스터는 "보기 편한 홈페이지를 만드는 사람"이다.
인터넷이란 결국 사람들간 커뮤니케이션을 도와주는 수단이다.
그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그래서 편해야 한다.
그가 인터넷에 매료된 것도 물리적 거리와 관계없이 사람을 맺어주는 뛰어난
대화수단이란 점에서였다.
몇년전까지만 해도 그는 새 소프트웨어가 나오면 마스터할때까지 밤새워
매달리곤 했다.
이제 그런일은 안한다.
그저 "새로운게 나왔구나"할뿐이다.
제아무리 첨단이라도 고도의 전문가들만 즐길수 있다면 인터넷 도구로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쓰기 쉽고 편한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드는 것.
이게 웹마스터 서홍원의 직업철학이다.
< 노혜령 기자 hro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14일자 ).
과학기술대 기계학 학사및 석사.
이 약력의 주인공은 인터넷 서비스업체 아이네트의 웹마스터인 서홍원(27)
서버운영팀장이다.
누가봐도 분명 수재다.
그러나 대학이후 학점을 들여다보면 이런 화려한 이력이 무색해진다.
학부 2.8, 대학원 2.2의 학점.
중하위권 성적이다.
대학 2학년때는 학사경고까지 받았다.
수재가 갑자기 지진아로 전락(?)한 이유는 뭘까.
주범은 바로 인터넷이었다.
서팀장이 처음 인터넷을 접한 것은 학사경고를 받던 89년.
일반인들은 "인터넷"이 뭔지조차 모르던 시절이었다.
과기대의 첨단설비 덕분에 그는 일찌감치 컴퓨터를 배웠다.
그러던중 우연히 인터넷에 접속하게 됐다.
그때부터 그는 수업 빠지길 밥먹듯 했다.
컴퓨터앞에서 밤새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하루 평균 7~8시간은 인터넷에 매달렸다.
그를 정신없게 만든 인터넷의 매력은 수재 공학도 답지않게 "채팅"이었다.
수만리 떨어져 있는 미국사람과 옆집 친구대하듯 대화할수 있다는게 너무나
신기했단다.
그의 인터넷 인생은 이렇게 "재미"로 출발했다.
국내 최고의 인터넷 전문가가 되겠다는 거창한 꿈은 없었다.
채팅을 좀더 편하게, 포르노사이트를 효율적으로, 인터넷 구석구석을 좀더
샅샅이 뒤져보자는 원초적 필요성 때문에 그는 인터넷에 빠져들었다.
"여행을 좋아하면 많은 곳을 다니기 위해 운전을 배우듯이, 인터넷을 즐기기
위해서는 관련기술을 터득할 수밖에 없었죠"
그는 인터넷마니아가 된 동기를 이렇게 비유했다.
그는 곧 인터넷 마니아들사이에서 유명인사가 돼 버렸다.
메일링 리스트를 첫 소개하는 등 국내 인터넷 개척자 역할을 톡톡히 했기
때문이다.
93년에는 개인 홈페이지도 만들었다.
대학원을 졸업하던 95년.
그는 국내 최초의 인터넷서비스 업체 아이네트의 웹마스터로 스카우트됐다.
서팀장은 전문가들사이에서 국내 최고수준의 웹마스터로 꼽힌다.
그가 95년초 만든 아이네트 홈페이지는 많은 웹마스터들에게 교과서였다.
미국 유력 인터넷 잡지인 넷가이드의 "골드사이트"로 선정되는 등
국내외에서 상도 많이 받았다.
인터넷을 통해 소리를 들을수 있도록 하는 소프트웨어인 "리얼오디오"도입,
홈페이지상에 "인터넷 노래방"개설, 인터넷 생중계 실시.
모두 그가 세운 국내최초 기록들이다.
그러나 정작 그는 "나는 웹마스터가 아니다"고 주장한다.
웹마스터가 되기까지 절반쯤왔을 뿐이란다.
그만큼 프로정신이 투철하다.
웹마스터는 제너럴리스트여야 한다.
기술적 지식도 중요하지만 기획력, 미적 감각, 때로는 엔터테이너로서의
기질도 필요하다.
시사상식도 빼놓을수 없다.
이런 자질을 위해 그는 즐겨보는게 세가지 있다.
첫째 다큐멘터리 영화.
여기서 그는 과장없이 순수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감동을 주는
다큐멘터리의 리얼리즘을 배운다.
둘째 만화영화.
무엇보다 재밌어서다.
그는 여기서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얻는다.
마지막으로 세상 돌아가는 일을 놓치지 않기 위해 신문과 사사잡지를 챙겨
읽는다.
최근에는 회계책도 보기 시작했다.
기업의 이미지를 관리하는 일인만큼 경영에 대한 지식도 있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떤게 좋은 홈페이지냐는 질문에 그는 "계곡에서 흐르는 물같아야 한다"고
답한다.
늘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순간도 똑같지 않은 계곡물.
홈페이지도 전체적인 이미지는 같지만 접속할마다 새로운 흐름을 제공할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훌륭한 웹마스터는 "보기 편한 홈페이지를 만드는 사람"이다.
인터넷이란 결국 사람들간 커뮤니케이션을 도와주는 수단이다.
그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그래서 편해야 한다.
그가 인터넷에 매료된 것도 물리적 거리와 관계없이 사람을 맺어주는 뛰어난
대화수단이란 점에서였다.
몇년전까지만 해도 그는 새 소프트웨어가 나오면 마스터할때까지 밤새워
매달리곤 했다.
이제 그런일은 안한다.
그저 "새로운게 나왔구나"할뿐이다.
제아무리 첨단이라도 고도의 전문가들만 즐길수 있다면 인터넷 도구로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쓰기 쉽고 편한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드는 것.
이게 웹마스터 서홍원의 직업철학이다.
< 노혜령 기자 hro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1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