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유업계가 르네상스 운동에 시동을 걸었다.

사양산업이란 오명을 벗고 고부가가치화를 통해 섬유산업을 부흥시키자는
민관합동 프로젝트에 착수한 것.

지난 9일 정부가 발표한 대구지역 육성방안이 그 청사진이다.

한국산업의 근대화를 이끌어 왔던 섬유산업.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 저비용을 무기로 한 아시아 각국의 추격이 본격화
되면서 섬유산업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섬유는 아직도 수출 2위, 무역흑자 1위의 포기할 수 없는 주력산업
이다.

인간이 옷을 입고 사는 한 수요가 있는 성장산업이기도 하다.

문제는 얼마나 고객의 니즈에 맞춘 제품을 효율적으로 공급하느냐다.

정부의 섬유산업육성 방안을 계기로 국내 섬유산업의 현황과 과제를
되짚어 본다.

IMF체제로 상징되는 경제위기로 섬유산업이 커다란 고비를 맞고 있다.

내수침체, 수출부진, 고금리라는 악재가 맞물려 섬유업계는 침체의 늪을
헤매고 있다.

최대문제는 동남아와 미국, 일본 등 선진국 사이에 낀 애매한 입장.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원가경쟁력을 잃은지는 오래다.

그렇다고 미국이나 일본 만큼 높은 기술력으로 고부가가치 제품을 만들어
낼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격면에서는 동남아에 밀리고, 제품력에서는 선진국에 눌리면서 섬유산업
의 최대 수익원인 수출시장에서 기반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환율에 따라 수출실적도 춤출수 밖에 없는 불안정한 구조가 돼
버렸다.

올초 섬유업계는 원화절하 특수를 누렸다.

환율이 두배로 뛰자 가격경쟁력을 무기로 수출드라이브를 걸수 있었다.

덕분에 섬유업계는 재고가 바닥나고 밀려드는 주문으로 즐거운 비명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환율효과도 잠깐.

아시아 경제위기로 인한 수요감소, 대만화섬업계의 증설러시 등으로 촉발된
공급과잉 등이 맞물려 섬유류 제품가격은 급락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환율이 급등했으니 제품값을 내리라"는 바이어들의 요구도 갈수록
거세졌다.

여기에 IMF체제의 고금리속에서 심각한 자금난에 몰린 업체들의 덤핑러시
까지 맞물려 수출가격은 폭락세를 보였다.

외형상 수출이 늘어도 돈은 벌지못하는 극심한 수출채산성 악화현상이
나타났다.

모 화섬업체 관계자는 "제품값이 원가 이하로 떨어져 물건을 팔수록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다"고 토로할 정도다.

전반적인 수출부진속에서 쿼터전쟁을 벌일 정도로 수출호황을 누리고 있는
의류업계도 마찬가지다.

수출은 늘었지만 단가급락으로 채산성은 엉망이다.

쿼터전쟁은 빛좋은 개살구일뿐이다.

합섬니트의 경우 8월말 현재 총 1억8천8백만달러어치를 수출했다.

전년동기대비 무려 30%가 증가한 수치다.

그러나 평균 단가는 무려 50% 떨어졌다.

수출해봤자 본전도 못찾는 출혈수출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합섬 스웨터 역시 수출은 지난해의 2배이상이지만 평균단가는 지난해의
70% 수준이다.

바지, 블라우스 등의 수출단가도 20%이상 떨어졌다.

업계 스스로도 "고환율은 아편 같은 것"이란 말을 한다.

고환율은 잠깐 수출증대라는 즐거움을 주는듯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오히려 근력을 떨어뜨려 경쟁력을 약화시킨다는 얘기다.

고환율속에서 저가 메리트만 내세우다간 한국제품에 대한 저품질 낙인이
찍힐 우려도 있다.

고환율에 젖어 경쟁력강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환율이 다시 떨어진
후에는 경쟁력을 회복할 기력마저 없어진다.

고환율 특수를 누리는 동안에 원가절감에 매진하고 품질력을 높이지 않으면
고환율은 기회가 아니라 아편일 뿐이다.

그러나 요즘 국내 섬유업계의 입장은 둘중 어느하나도 이루기 힘든 여건에
있다.

고금리 때문에 이자비용이 워낙 비싸 원가절감은 커녕 오히려 비용증가
요인이 되고 있다.

고환율로 수입원료값이 오른 것도 원가상승요인이다.

그렇다고 제품력을 높일 여력도 없다.

신제품을 개발하고 선진국형 고부가가치 상품을 만들려면 R&D 투자를 해야
한다.

자금난에 허덕이는 요즘 업계로선 투자비를 늘릴 형편이 아니다.

여기에 "섬유산업은 노동집약적인 후진산업"이라는 정부의 사양산업론까지
가세하면서 섬유업계의 자금난을 부채질했다.

금융권에서 대출때 적용하는 등급에는 섬유산업이 최하위에 랭크돼 있다.

올 상반기동안만도 도산한 섬유업체가 8백70곳을 넘는다.

이렇다보니 세계속에서 한국섬유산업의 위상도 흔들리게 됐다.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대만이다.

대만은 올 상반기 73억달러의 수출성적을 올렸다.

한국(84억5천만달러)을 바짝 추격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기세"다.

한국의 올 상반기 수출은 7.7%가 줄었다.

반면 대만은 7.8%가 늘었다.

한국은 하락세, 대만은 상승세를 타고 있다.

한국은 95년을 정점으로 3년 연속 수출하강곡선을 그리는 반면 대만은
96년 정체를 보인것 외에 매년 7%대의 고속성장을 누리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내년께는 대만이 한국을 추월하는게 아니냐는 우려가 팽배
하다.

내용(무역수지)면에서는 이미 대만업체가 한국을 추월했다.

지난해 대만은 1백66억2천만달러 수출에 12억9천8백만달러의 무역흑자를
올렸다.

한국의 수출흑자 12억2천만달러를 눌렀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해결책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이제는 아시아의 저가추격에서 벗어나는 길밖에 없다는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고급시장으로 옮겨가는게 공급과잉-수출가격 하락-채산성 악화-적자경영-
경쟁력하락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에서 벗어날수 있는 길이란 얘기다.

정부가 이번 섬유산업 육성방안의 별칭을 "밀라노 프로젝트"로 붙인 것도
고부가가치화 전략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다.

현재 업계에서는 크게 3개의 기둥으로 탈불황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첫째가 외자유치다.

화섬을 중심으로 한 대기업들은 비주력 사업을 과감히 외국기업에 팔아 그
돈으로 빚을 갚고 재무구조를 튼튼히 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현재같은 고금리 구조에서는 이자비용을 얼마나 줄이느냐가 기업경영의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드물긴 하지만 해외채권발행에 성공하는 사례도 있다.

둘째 고급제품을 내세운 선진시장 공략이다.

중국, 아시아 시장은 침체기인 반면 미국, 유럽 등 서구는 여전히 경기가
좋은 편이다.

수요가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런 시장에서는 아시아처럼 저가제품으로 공략할수 없다.

고급제품이라야 파고들수 있다.

따라서 고급품을 개발하고 선진국시장을 개척하는데 섬유업계가 주력하고
있다.

셋째 생산합리화, 고객만족 경영 등 내실다지기다.

결국 기업의 경쟁력이란 제품력과 영업력에서 나온다.

외자유치를 통한 재무구조 개선이 하드웨어의 구조조정이라면 내부의 경영
합리화는 소프트웨어의 리스트럭처링이다.

이 두가지를 겸비해야 우량기업으로 변신할수 있는 것이다.

< 노혜령 기자 hro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1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