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두진씨의 타계로 청록파 시대가 막을 내렸다.

일제하의 암울한 시대에서 "청록집"으로 민족정신의 횃불을 밝힌지 반세기.

해방 이듬해 동갑내기 박두진과 박목월이 네살 아래인 조지훈을 만나
쌓기 시작한 문학의 봉우리만 높다랗게 남아있다.

문학적 성과가 돋보인 만큼 이들의 우정도 남달랐다.

누구보다 개성이 강한 시인들이었지만 닮은 점이 많았던 현대시단의
3대 거목.

세사람은 세상을 떠날 때도 10년을 주기로 뒤를 이었다.

가장 먼저 타계한 사람은 막내뻘인 지훈이었다.

68년 떠난 그를 따라 10년뒤 목월이 가고 또 10년이 흐른 지금 두진이
그 곁으로 갔다.

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39년 시문학지 "문장"으로 등단했으며 모두
정지용의 추천을 받았다.

두진의 고향은 경기도 안성.

목월은 경주 출신이고 지훈은 경북 영양에서 났다.

이들은 "청록집"을 내기 전까지 다른 곳에서 살았지만 문학적으로는
끈끈한 유대를 간직하고 있었다.

해방 직후, 서울에 터를 잡고 있던 두진과 지훈은 경주 토박이 목월을
불러올렸다.

지훈과 목월은 해방 이전에 만났지만 두진은 "청록집"을 내면서 처음
대면했다.

지훈과 목월의 만남은 지금도 문단에서 회자되는 일대 "사건"이었다.

해방전 지훈이 경주로 내려갔을 때 목월은 경주역까지 나와 "조지훈
환영"이라는 플래카드를 흔들며 그를 맞았다.

이 자리에서 지훈은 유명한 시 "완화삼"을 써주고 목월은 "나그네"로
화답했다.

서울에서 같이 활동하는 동안에도 세사람은 강한 개성 속에 폭넓은
공감대를 갖고 있었다.

작품 경향은 서로 달랐지만 자연과 생에 대한 초연한 정신은 하나였던
것이다.

특히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두진과 불교의 선사상에 몰두했던 지훈의
문학세계는 종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목표에서는 놀랄 정도로
공통분모가 많았다.

해방 이후 교단에서 굵직한 시인들을 많이 배출한 것도 공통점이다.

두진은 연세대를 중심으로 정공채 마종기 강은교 씨등을 길렀고 목월은
한양대에서 이한구 이중 허영자 씨등을 가르쳤으며 지훈은 고려대에서
김종길 최동호 씨등을 키웠다.

세사람의 우정은 2세까지 이어져 지훈과 목월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가족들이 종종 모임을 갖곤 했다.

목월의 장남 동규(서울대교수)씨는 "지난해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만
해도 세 집안이 우리집에 모여 자주 얘기꽃을 피웠다"며 "사는 곳과 하는
일이 각기 다르지만 앞으로도 계속 만나 떠난 분들의 삶과 문학을 기리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 고두현 기자 kd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2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