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만나면 느낌이 좋은 사람들이 있다.

디자인커넥션의 김혜옥 사장은 그런 사람중 하나다.

그는 40대 후반의 나이답지 않게 맑고 싱그러운 느낌을 준다.

크리에이터로 오랫동안 창조적 작업에 매달려 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천성
때문이기도 하다.

김 사장은 요즘 국내 CI업계의 "뜨는 신데렐라"다.

그러나 그를 마냥 느낌이 좋은 사람이라고만 보는 것은 잘못이다.

한때 별명이 "억척이"였을만큼 일에 대한 김 사장의 열정은 뜨겁다.

사실 열정이 없었다면 한국 CI업계를 이끌어갈 리더라는 스스로의 자부심은
한낱 웃음거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미국에서의 10년 공부는 김사장이 얼마나 뜨거운 여자인지를 잘 말해 준다.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다녔던 그는 좀더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아래 84년
미국행에 올랐다.

교육도시인 보스톤에 자리잡은 하버드대 미술대학원에 들어가 그래픽
디자인공부에 매달렸다.

순수회화에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전공을 바꾼 것은 앞날을 내다본 은사들의
권유 때문이었다.

당시만해도 컴퓨터 그래픽이 그렇게 성행하지 않던 시절.

보스톤에서 5년을 지낸 김 사장은 뉴 헤이븐의 예일대로 옮겨 쟁쟁한
교수들로부터 사사하게 됐다.

우리에게도 눈에 익은 IBM과 ABC방송, UPS의 CI를 만들었던 폴 랜드 교수,
명작 "그래픽 디자인 매뉴얼" 저자로 당시 예일대에서 교편을 잡았던 스위스
바젤 스쿨 아르민 호프만 교수 등에 의해 그는 프로로 다시 태어났다.

공부도 어려웠지만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기란 정말 힘들었다.

자기가 만든 CI의 의미를 설명하는 프리젠테이션이 있을 때마다 숨이
막혔다.

자라온 환경이 다른 그로선 미국인 동료만큼 유창하게 설명할수가 없었다.

견디기 힘들 때마다 성당에 나가 기도를 했다.

영세도 받았다.

기도는 마침내 결실을 거두기 시작했다.

88년 미국정부는 그가 슬레이브호(아프리카 흑인을 맨처음 미국에 실어나른
배) 디자인을 이용해 만든 작품을 아프리칸-아메리칸(흑인미국시민) 미국
착륙 3백50주년 기념로고로 선정했다.

또 같은해 개인전도 열어 호평을 받았다.

졸업후 한동안 세계적 건축디자인업체인 케임브리지 세븐에 다니던 김씨는
94년 한국행을 결심하게 됐다.

산란기 모천을 찾는 연어처럼 이제 고국을 위해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다.

가을 귀국과 함께 디자인커넥션을 세웠다.

기업CI뿐 아니라 한국 고유의 이미지도 디자인하기 위해 힘썼다.

미국 생활시절 한국이라는 이미지를 한눈에 알수 있게 하는 시각디자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국가 CI에도 눈을 돌리게 했다.

지난해 가을 총무처가 주관한 국가상징전시회에 태극문양 국화 국새 등
한국적 디자인을 응용한 7백50여작품을 선보였다.

또 김대중 대통령취임 기념 엠블렘도 만들었으며 훈민정음체를 이용해
시나브로 담뱃갑 디자인도 해줬다.

만호제강, 대한도시가스, 2001년 세계신용협동조합대회 엠블렘, 광주 015
시티폰의 CI작업도 했다.

김 사장의 요즘 관심사는 CI와 멀티미디어를 접목시키는 것이다.

인터넷과 PC 보급이 확산될수록 멀티미디어용 CI 수요가 늘어날 것이
분명해서다.

이미 멀티미디어팀을 발족하고 대우자동차와 쌍용자동차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또 캐릭터 사업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21세기 문화전쟁 시기에 CI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개인 기업
국가가 경쟁력을 가질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이것이 CI 전문가들이 해야할
일입니다"

< 강현철 기자 hckang@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2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