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부실금융기관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미국식 정리신탁공사(RTC)제도를
도입하는 것도 바람직한 해법이 될 것으로 지적됐다.

애드워드 그래함(Edward Graham) 미 국제경제연구소(IIE) 수석연구위원은
미국이 정리신탁제도를 도입한 것처럼 한국도 은행경영에 대해 광범한
감독권을 갖는 부실정리 기구를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부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재정증권을 발행해 부실정리기구
를 지원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특별기고를 정리한다.

< 김혜수 기자 dearso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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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빅딜"로 불리는 재벌 구조조정과 금융부문의 개혁을 통해 경제
전반에 대한 구조조정 노력을 벌이고 있다.

만일 이러한 노력이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면 지난 80년대말 미국이 도입
했던 정리신탁공사(RTC:Resolution Trust Corporation)를 하나의 모델로
삼아 금융부실을 처리할수 있을 것이다.

당시 미국 금융위기의 주범은 저축대부조합(S&L)이었다.

S&L은 당초 가계의 장기저축을 유도하기 위해 정부 주도하에 만들어진
일종의 협동저축기관이었다.

조합원들의 저축으로 조성된 자금을 조합원들에게 주택구입 자금이나
개보수 비용을 다시 대출해주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그러나 80년대 금융산업 규제완화로 S&L들은 정크 본드 투자를 늘리는 등
자산 포트폴리오를 대폭 변경하기 시작했다.

S&L의 부실을 가속시킨 것은 도덕적인 해이(모럴 해저드)였다.

S&L들의 자산 대부분은 미국 연방정부 산하의 연방 예금 보험공사(FDIC)가
지급을 보장하는 가계예금이었다.

저축 대부 조합들은 정부의 보장을 믿고 위험한 투자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 수많은 저축조합들이 지급불능 지경에 빠졌고 부채는 고스란히
미국 정부가 떠안게 됐다.

여기서의 교훈은 금융부문의 규제가 완전히 해제되어선 안된다는 것이다.

금융기관들의 위험한 투자를 제한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일정한 규제와
효율적인 감독이 필요하다.

이 두가지는 한국에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S&L이 초래한 금융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89년 9월 한시기구인 정리신탁공사
(RTC)가 설치됐다.

RTC는 S&L의 파산관리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S&L의 자산과 부채를 인수한 후 이를 매각했다.

또한 S&L에 들어있던 예금을 대신 지불하거나 건실한 S&L로 예금을 이전
함으로써 예금자 보호에도 만전을 기했다.

부실한 S&L의 자산을 매각하고도 채무를 다 갚지 못한 경우에는 정부가
재정자금을 투입해 채무를 상환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RTC는 총 7백47개의 부실 금융기관을 처리했다.

장부상 자산규모는 4천5백80억달러.

RTC는 이중 98%의 자산을 매각해 3천9백70억달러를 거둬들였다.

적자는 6백10억달러였다.

RTC가 모든 임무를 끝낸 95년까지 투입된 총경비는 8백19억달러로 집계됐다.

예정보다 1년이상 앞당겨 매듭지어진 것이다.

한가지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이 있다.

RTC는 사설 계약자들을 통해 부도난 저축대부조합의 자산을 처리했다.

이 과정에서 사설 계약자에 대한 관리가 느슨했던 나머지 초기엔 자산매각에
상당한 차질이 빚어졌었다.

따라서 사설계약자를 활용할 경우 적절한 감독과 관리가 지속돼야 한다.

그렇지만 한국이 미국의 RTC모델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식 RTC가 미국에서처럼 엄격한 규정하에 운영된다고 하더라도
한국에서는 거의 모든 금융기관들이 막대한 부실채권을 안고 있는 만큼
이 모두를 정리 대상으로 만들수는 없다.

따라서 몇개 은행을 살려두되 살아남은 은행들의 투명하지 못한 대출관행을
완전히 뜯어고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식 RTC가 반드시 은행의 경영을 감독할 권한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정리기구를 통해 은행을 통제하는 기간은 한정돼야 할
것이다.

적어도 부실정리 기간동안 만큼은 부실금융처리 기구가 은행경영을 철저히
감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동시에 은행 경영진에 대해서도 강도높은 훈련이 이뤄져야 한다.

이같은 역할을 해내려면 미국 RTC에서처럼 전문적이고 자질이 뛰어난
풀-타임 스태프가 필요하다.

RTC가 폐쇄된 후엔 전문 금융 지식과 풍부한 경험을 갖춘 이들을 금융기관
에 투입해 RTC에서 쌓은 능력을 활용토록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미국과는 약간 다른 해법을 택할 수도 있다.

정부가 채권을 발행해 RTC가 인수한 부도은행들의 부실채권을 액면가로
교환하는 방법이다.

부실채권을 증권화해 유동성을 부여하는 것은 채권시장을 활성화시키는
데도 효과적이다.

채권시장은 자본시장을 원활하게 움직이도록 하는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이같은 방식은 또다른 딜레마를 야기할 수 있다.

무수익 자산을 수익자산으로 교환해주는 것은 은행주주들에게 공공 자금
으로 횡재를 안겨 주게 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합리적인 해결 방안은 무수익 자산을 교환하기 앞서 우선 시장
가격대로 감가상각을 하는 것이다.

정부는 그런 다음 재평가된 가격으로 은행의 자산을 인수할 것이다.

이 경우 은행 지분은 부실채권 정리기관이 소유하게 된다.

은행을 민영으로 남겨두기 위해서는 이후 은행 지분을 공공분야에 매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한국정부는 대규모 부실채권 부담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주식 발행주간사의 독자적인 평가에 의해 부실 채권의 교환 비율을
정한후 RTC를 통해 공공에 매각되야 한다.

이 경우 자산과 부채 교환을 통해 기업 자산구조를 조정하고 새 자산은
민간에 이양시키게 된다.

이처럼 한국식 RTC는 공공부문이 안고 있는 부채와 자산을 민간에 이양할
수 있는 방안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은행의 자산구조 조정을 촉발할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식 RTC는 대형금융기관 및 기업들의 왜곡된 경영구조를 바로
잡는 기회도 갖게 된다.

실제 민영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의문은 누가 민영화될 자산을 매입할
것이냐에 있다.

한국은 가계 저축이 매우 높은 수준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구매자는 일반
국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중개할 위해서는 전문 중개기관이 필요할 것이다.

예를들면 뮤추얼 펀드나 연금기금을 운영할 수 있는 기관들이 필요하다.

한국식 RTC의 최종적인 과업은 이들을 돕는 것이다.

이 모든 점을 종합할 때 한국식 RTC가 담당할 과제는 결코 만만치 않다.

그러나 한국에는 전문적이며 재능있는 인력이 풍부하다.

이들을 활용하면 한국이 직면한 위기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2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