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물건이라도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다.

사회현상도 마찬가지다.

각자의 가치관이나 신념,살아온 환경등에 따라 같은 현상이라도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할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사회현상을 해석하는 "절대적 잣대"는 없다고 할수 있다.

유일한 기준이나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가 있다면 그 곳은 전체주의
사회일 것이다.

사회철학자인 칼 포퍼가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란 저서를 통해 "전체주의
는 실패할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 것도 사회의 다양성을 강조한 것이다.

포퍼는 인간은 끊임없는 상호비판을 통해서만 진리에 접근할수 있다며 열린
비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세계 헤지펀드업계의 대부 조지 소로스가 국제금융시장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 것은 은사인 포퍼로부터 틀에 박히지 않은 자유로운 사고를 배울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포퍼의 비판적 합리주의는 정부 주도의 기업.금융구조조정을 벌이고 있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던져준다.

권위에 의존한 구조조정은 성공을 장담할수 없다는 점이다.

상당수 기업인들이 사석에서 현 정부가 과거 권위주의 정부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토로하고 있는 사실은 이런 맥락에서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이같은 "기업인 정서"는 "힘있는" 사람들의 그동안 발언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5대그룹 빅딜은 국민을 우롱한 것이다. 핵심주력업종을 제외하고 처분이
어려운 기업들만 골라 합치려는 것에 불과하다"(박태준 자민련총재, 9월13일
기자회견서 5대기업 구조조정안에 대해)

"나라경제가 비상사태에 놓여 있는데도 재벌들은 아직 구습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대기업들은 상호채무보증 금지등 정부와 약속한 구조조정
5대원칙을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김태동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9월초
기자회견서)

"경제구조 개혁은 자율성을 잃은 금융시스템 아래서 특권을 누리면서
사실상 국민경제 지배자로 군림해온 재벌구조를 해체해 국제경쟁력을 높이는
것이다"(김원길 국민회의 정책위의장, 8월20일 제2건국 세미나서)

이들의 발언은 대기업에 대한 부정적 시각의 일단을 드러낸다.

한결같이 "기업인은 IMF를 초래한 주범이며 아직도 정부 정책에 반해 자기
이익만 챙기고 있다"는 비난이 은연중에 깔려 있다.

기업인들은 두가지 점에서 이같은 인식이 권위적임을 지적하고 있다.

우선 빅딜만이 구조조정이라는 생각은 크게 잘못됐다는 것이다.

기업들은 정부의 이러한 사고가 권위로 누르려는 과거 행태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기업인들은 시장 원리에 상반되는 정부의 밀어부치기식 빅딜이 큰 후유증을
남길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반도체 발전설비등 5대그룹 7개업종 구조
조정안이 관련업체들의 첨예한 이해대립으로 성공여부가 불투명하다는 점은
구조조정의 성패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 하나는 정치인과 관료 자신도 IMF 관리체제를 초래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 집단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은채 대기업만 희생양으로 만드는 것은
억울하다는 항변이다.

재계 일각에선 여기다 정부가 위기를 증폭시키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단기실적주의에 집착한 나머지 무리수를 연발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내년말까지 부채비율을 자기자본의 2백%이내로 줄이고 은행 BIS
(국제결제은행) 비율을 8%이상으로 맞추라는 정책을 단적인 예로 든다.

일본도 BIS 4%가 1차목표인 상황에서 8%를 단기간에 맞추도록 하고 부채
비율을 급격하게 줄이라고 강요한 까닭에 돈이 돌지 않고 가진 자산 모두
팔아 빚 갚느라 정신없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80년대 금융위기때 10년 가까이 걸려 위기를 수습한 사례도 거론
한다.

기업인과 정부당국중 누가 착각하고 있는지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포퍼의 말처럼 절대적 진리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정부가 권위주의화 하는 조짐이 보인다는
점이다.

정부는 결코 만능이 아니다.

정책당국자는 열린 마음으로 기업인들의 주장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최필규 < 산업1부장 phil@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2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