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제약산업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을 꼽으라면 단연 낙후된
유통시스템이다.

복잡한 가격구조는 도표로 설명해야 이해할 정도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깎아주기(할인) 덤으로 더주기(할증) 이면계약 등의
음성거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야말로 난맥상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렇게 된 기본적인 이유는 3백50여 제약업체가 난립, 과당경쟁을 일삼아
의약품이 과잉공급된데 있다.

예컨대 우황청심원의 경우 무려 58개 회사가 만들어내고 있다.

이익은 없지만 제품의 구색을 갖춰야 다른 제품도 끼워 팔수 있다는게
제약사의 하소연이다.

한 회사가 외국에서 제값주고 기술을 도입, 괜찮은 제품을 만들어 돈좀
번다 싶으면 여지없이 몇개월 후에 십여개 모방제품이 쏟아지고 있는게
제약업계의 서글픈 현실이다.

의약품의 공급과잉은 전체 매출의 80%를 외상매출이 차지하는 기현상을
낳고 있다.

공급이 넘치니 도매상 병원 대형약국은 외상을 천천히 갚아도 문제될게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제약업체가 제품을 출하해 대금을 받기까지 걸리는 매출채권
회수기간은 평균 2백40일로 국내 산업계에서 가장 길다.

뿐만 아니라 병원이나 약국들이 수많은 공급자를 앞에 두고 팔짱을 끼고
있어 제약회사 입장에서는 할인 할증을 해주지 않을수 없다.

이같은 현상은 공급과잉이 빚어진 70년대 초반부터 나타난 이래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시정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한국 제약업계의 불치병이
돼버렸다.

엉망진창인 유통체계는 <>제약업체간의 제살깎아먹기식 가격경쟁
<>6백50여개의 도매상이 난립, 대형약국 및 종합병원에 초도 납품할 때
벌이는 이른바 "랜딩"전쟁 <>과학적 체계적 물류체계의 부재 등에서 비롯되고
있다.

우선 도매업체에 책임이 있다.

영세하고 냉장.냉동보관, 전산화 바코드시스템 등 체계적인 물류체계를
갖추지 못한 대부분의 도매업체들은 중간마진 챙기기에 급급한 나머지
나름의 자생력을 키우지 못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 제약업체는 물류 및 판매관리비로 매출액의 33.5%를
쓰고 있다.

다른 업종의 11.6~11.9%에 비해 매우 높은 수준으로 제약업체의 경쟁력을
약화시킨 장본인으로 지적받고 있다.

유통일원화를 통해 도매업체는 유통에, 제약업체는 연구개발 및 생산에
전념시키겠다는게 보건 책임자가 새로 등장할때마다 하는 약속이지만 지금껏
공염불에 그치고 있다.

물론 도매업체도 나름대로 변명할게 있다.

제약업체가 마구 제품을 밀어내면서 순응하기를 강압하니 따르지 않을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도매업계는 지난 95년 7월 스위스 주릭사가 진출할 것이라는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

거대 유통업체가 들어오면 자신의 존립기반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똘똘 뭉쳐 주릭의 상륙을 저지했다.

그후 서울시의약품도매협회는 30여개의 도매업체들이 모인 가운데 가칭
서울연합약품이란 협의체를 결성해 연합물류센터를 추진했으나 IMF 상황으로
유야무야 된 실정이다.

이와 함께 의약품도매협회는 총1천2백억원의 재정특별융자를 신청해 전국
5~7개 권역에 의약품 유통단지를 세우겠다고 하였으나 이나마 12%의 높은
금리와 경영상황 악화로 포기할 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정작 큰 문제는 의약품 도매업계가 문제해결의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는데 있다.

올해부터 실시키로 했던 우수의약품유통관리기준(KGSP)제도를 강력한
단결력으로 저지했다.

자금과 전산화마인드가 없어 도저히 실현불가능하다는게 이유였다.

부산의 우정약품 세화약품 복산약품, 서울 동산약품 등 10여개업소만이
KGSP기준을 갖췄다가 상대적으로 손해만 봤을 뿐이다.

국공립병원 및 사립 의대부속병원들도 이같은 도매업체의 약점을 노려
온갖 횡포를 부리고 있다.

보건당국과 제약업체는 의료보험 고시가보다 24.17% 이상 낮은 가격으로는
납품하지 말자고 "의약품 공정거래 자율규약"을 맺었으나 병원은 이보다
낮은 가격으로 납품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또 의국운영비 임상연구비 재단기부금 등의 명목으로 납품에 대한 사례를
요구하고 있다.

그동안 많은 지탄을 받고 제약업체가 나름의 자정노력을 기울인 끝에
대형병원들이 고시가보다 35~40% 낮게 약품을 구입하던 관행은 많이 사라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제약사가 한품목당 4백만~2천만원의 랜딩사례비를 임상연구비란
명목으로 지급하는 풍토는 여전한 실정이다.

이와 관련, 보건당국은 특별정화위원회를 만들어 조만간 불법거래 단속에
착수할 계획이다.

3백50여개 제약업체와 이를 따르는 6백50여개 도매업체의 난립.

별다른 주특기가 없는 제약업체와 도매업체가 부창부수하는 추악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경쟁에 의해 좋은 제품을 보다 싼값에 공급해야 한다는 시장경제의
원칙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악폐다.

대량 생산으로 값이 떨어지면 소비자가 혜택을 봐야 할텐데 그 이득이
고스란히 병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꼬박꼬박 의료보험료를 내는 국민들만 손해를 보고 있는 셈이다.

과학적이며 공정 경쟁이 가능한 의약품 유통체계의 실현은 더 이상 미룰수
없는 현안이 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손해를 보는 마이너스섬 게임의 골만 깊어질 뿐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2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