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만나기 전 갤러리아는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손길이 닿자 비로소 갤러리아 백화점은 긴잠에서 깨어나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갤러리아백화점의 용은정 대리(31).

그녀는 백화점에 생명을 불어 넣는 마술사다.

그녀에게 백화점은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다.

갤러리아의 얼굴에 고고한 품위와 약간은 도도한 개성이 스며들때까지
그녀의 손길은 쉼이 없다.

마치 결혼식을 앞둔 신부에게 꼼꼼한 화장을 해주듯이.

VMD(Visual Merchandiser).

일반인에게 다소 낯설지만 그녀의 명함에 박혀 있는 직업명이다.

상품전략가, 실내공간구성디자이너장치예술가.

어려운 이름이어선지 아직껏 VMD에 적합한 통일된 우리말조차 없다.

쇼윈도 설치, 매장구성에서부터 내부기둥 장식, 대형걸게그림과 조형물
설치, 마네킹코디까지.

백화점을 하나의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디자인하는 것이 그녀의 일이다.

그녀의 손길이 있어 갤러리아는 천의 얼굴을 가진다.

백화점의 부분이 아닌 전체를 다루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녀가 담당하는 갤러리아백화점 압구정점은 자타가 인정하는 국내 최고의
고품격 백화점.

한국의 패션을 선도하는 압구정에서도 갤러리아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갤러리아가 가는 방향이 곧 압구정패션의 나침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백, 수천만원씩 하는 고가품만을 모아 놓았다고 저절로 갤러리아
가 최고급 백화점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을까.

"생명과 개성이 없는 백화점에 진열돼 있는 고가품은 창고에 저장돼 있는
재고품일 뿐이다"

디스플레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그녀의 설명이다.

거대한 창고가 그녀를 통해 살아 꿈틀대는 백화점으로 되살아나게 된다는
얘기다.

아마도 백화점에 디스플레이가 없다면 모든 백화점은 똑같은 모습을 한
무미건조한 건물이 될 것이다.

그녀는 다산모다.

적어도 두달에 한번씩은 끊임없이 출산한다.

계절이 바뀌거나 큰 행사때마다 백화점 전체를 재단장하면서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시킨다.

"모진 산고를 겪으면서 갓난아기를 낳는 산모의 마음을 잘 알 것 같아요"

미혼이지만 백화점을 항상 생명체로 생각하고 있기에 가능한 마음이다.

그녀의 출산은 대개 새벽녘이 밝아서야 이뤄진다.

고객이 모두 떠난 한밤중이 되어서야 작업이 가능해서다.

올빼미처럼 살다보니 백화점 경비아저씨와 제일 친하단다.

개점전 그녀의 가슴은 가장 두근거린다.

새벽녘에 자신이 낳은 생명체에 대해 고객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백화점에 유행을 반영하고 리드하는 것도 그녀의 몫이다.

특히 갤러리아는 튀어야 한다.

"대중이 호응하면 실패한 것이며 패션매니아들이 좋아해야 비로소 성공한
디스플레이다"

주고객인 20대 패션매니아들의 취향을 파악, 이들을 선도하기가 쉬운
일만은 아니란다.

일주일에 2~3권의 책을 읽고 틈나는대로 영화관이나 뮤지엄 갤러리 등을
찾는 것도 이 때문이다.

패션흐름을 파악하고 아이디어를 짜내기 위해서다.

요즘 그녀의 관심은 온통 민족문화에 쏠려 있다.

외국풍만을 모방한 디스플레이는 생명력이 없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됐다.

특히 아직도 일본식 디스플레이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현실이 못마땅하다.

한국문화를 승화시킨 세계적 수준의 디스플레이.

"한국적인 요소가 뒷받침되지 못하면 이 분야에서도 국제 경쟁력은 있을
수 없다"는게 그녀의 생각이다.

그녀는 프랑스 유학파(C.E.C.E.C 대)다.

졸업후 같이 일하자고 끈덕지게 늘어진 한프랑스 업체가 있었다.

그럼에도 굳히 뿌리치고 귀국했다.

한국에 있을때 민족문화를 너무도 등한시 한 죄책감에서다.

그녀는 요즘 판소리와 고궁의 단청에 푹 빠져있다.

"디자인 전문회사를 차려 한국문화의 정수를 활용한 디자인을 세계에 수출
하겠다"

야심찬 그녀의 미래설계이다.

< 류성 기자 sta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