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위원회가 5대그룹의 사업구조조정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먼 거리에서 5대그룹의 자율협의를 지켜보던 금감위가 드디어 "칼"을 빼든
것이다.

금감위는 5대그룹 구조조정을 신속히 마무리짓기 위해 새로운 기구를
출범시키겠다고 밝혔다.

바로 5대그룹의 주채권은행과 5대그룹에 대한 실사를 담당했던 주채권은행의
자문회계법인으로 구성될 "5대그룹 사업구조조정 추진위원회"다.

이 기구는 5대그룹별로 구성된 주요채권단협의회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여기에는 은행및 회계법인관계자,은행이 지명하는 기업구조조정전문가로
구성된 업종별 "실무추진위원회"도 설치된다.

5대그룹 관계자는 배제된다.

채권금융기관이 주축을 이룬다는 얘기다.

이 기구가 할 일은 전경련의 사업구조조정안에 대한 심의및 평가다.

5대그룹이 합의했다고 해서 모두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심의해서 타당성
여부를 가리겠다는 뜻이다.

평가기준은 시너지효과와 경쟁력강화정도, 부실화위험정도, 자구계획의
실현가능성, 재무구조 건실화효과, 이해관계자간 손실분담의 적정성 등이다.

평가결과 미흡하다고 판단되면 합리적인 대안도 제시하게 된다.

또 자구계획에 상응한 금융조치방안도 제시될 수 있다.

여기에는 상호지급보증 해소방안이 포함된다.

추진위원회의 평가결과는 "잠정의견" 형식으로 5대그룹과 주요채권단협의회
에 전달된다.

5대그룹과 채권금융기관이 이 잠정의견을 바탕으로 구조조정안에 최종
합의하면 재무구조개선약정에 반영한뒤 시행하면 된다.

그러나 합의에 실패할 경우엔 채권금융기관주도로 한계계열사및 사업부문의
매각 또는 정리, 보증채무이행청구 등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과 채권보전
절차가 병행돼 추진된다.

한마디로 추진위원회의 안을 5대그룹측이 수용하지 않으면 사실상의 "청산"
절차에 들어갈 수 있음을 예고한 것이다.

특히 대주주들이 대부분 계열사 지급보증을 서고 있는 상황에서 채권보전
절차가 진행될 경우 소액주주로 전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헌재 위원장은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과잉투자 등으로 살아남기
어려운 기업들에 대해선 처음으로 돌아가 원칙대로 처리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같은 금감위의 고강도 압박은 지난 2월부터 추진해온 이른바 "빅딜"이
반년이 넘도록 큰 진전이 없어 이를 방치할 경우 대외신인도에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금감위가 이날 반도체 분야에서 책임주체 선정 합의의 이행을 담보할 수
있는 사전조치가 필요하며 석유화학 항공기 분야에서는 외국인 투자자가
대주주및 경영주체가 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이 제시되지 못했다고 지적
하는 등 필요이상으로 점수를 박하게 매긴 것도 이런 위기의식 때문이다.

금감위로선 대마불사식 사고에 경종을 울려야 할만큼 절박한 상황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한 관계자는 "지난해 기아자동차처럼 여신이 많고 국민경제에 미치는
파장이 크다는 이유로 처리를 지연시킨 전례를 되풀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청산" 카드가 단순한 엄포용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다.

앞으로 채권금융기관과 5대그룹간 입씨름이 한층 격렬해지는 상황은 불가피
할 듯하다.

< 허귀식 기자 window@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