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종이를 만들어 썼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백제에서 이미 4세기 후반에 사서를 편찬했고 610년 고구려의 담징이
일본에 제지기술을 전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4~7세기초에 제지기술이 중국
에서 도입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종이는 국립 경주박물관에 있는 신라시대의
"범한다라니"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근년에 평양 고구려 유적에서 삼베를 원료로 한 마지가 발견됐다는 소식도
있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특히 통일신라때는 지금 우리가 한지라고 부르는 닥나무종이(저지)가 크게
발달했다.

호암미술관 소장의 "대방광불화엄경"(755년)에는 "닥나무에 향수를 뿌려가며
길러 껍질을 벗겨내고 그것을 맷돌로 갈아 종이를 만든다"는 제조법까지
기록해 놓았다.

이렇게 만든 종이가 누에고치처럼 희고 부드러우며 섬유질이 고르고 질긴
"백추지"다.

"계림지"라고도 불렸던 신라의 백추지는 중국에서도 "천하제일"로 치던
명품이다.

삼국시대의 제지기술은 고려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고려가 송나라에 보낸 조공물에는 백추지 견지 아청지 불경지 등 종이가
빠진적이 없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인쇄술의 발달로 종이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태종
때인 1415년에는 서울에 국영 제지공장인 "조지서"를 설치해 대량생산을
시작했다.

이곳에는 85명의 지장이 배치됐다.

각 도의 지방공장에는 모두 6백98명의 지장이 소속돼 있었다.

귀리나 보리짚, 버드나무의 줄기, 율무를 원료로 한 종이도 만들어졌다.

1541년(중종 36년)에 김안국이 만든 태지는 이끼에 닥나무를 섞어서 만든
신개발품으로 유명하다.

천연염료를 쓴 각종 색지도 등장했다.

지난 91년부터 1천여년의 전통을 이어온 한지 복원연구에 나섰던 한솔제지가
상품개발에 박차를 가해 고부가가치 수출산업으로 키우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중국 일본보다 뒤늦기는 했어도 "문화상품다운 상품이 이제야 나오려나
보다"하는 부푼 기대를 갖게 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