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테리어 디자이너 최시영(41)씨.

그는 "인테리어 전도사"다.

91년부터 지난해까지 7년 가까운 기간동안 서민들을 위한 주택 무료개조를
해왔다.

덕분에 주택 개조하면 최시영이란 이름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정도가 됐다.

최씨의 인기는 월간지 "행복이 가득한 집" 발행인 이영혜씨가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줬다.

그의 인테리어 작품이 실린 기사를 눈여겨 본 이씨가 주택 무료개조
사업을 제의해온 것.

뜻이 통한 두 사람은 국내 처음으로 매달 서민들을 위한 주택개조 활동에
들어갔다.

일반인들에겐 부자들의 사치 정도로만 여겨졌던 인테리어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데는 그의 작업이 크게 한몫했다.

잡지마다 인테리어를 다루지 않으면 장사가 안될 정도였다.

덕분에 이젠 누구나 인테리어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입에 담게됐다.

최씨 개인적으로도 이 일은 크게 도움이 됐다.

주택 인테리어 부문에선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자연스럽게 자신의
전문 분야가 됐기 때문이다.

어릴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유난히 좋아했던 그의 꿈은 사실 화가였다.

당연히 미술대 진학을 원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음악이나 미술같은 예능은 천한 것이라 여긴 아버지의 고정관념을 어쩔수가
없었다.

미대는 아니면서 "그림 그리는 것과 가까운" 학과는 없는지 두리번거리던
고교생 최시영의 눈에 띈 것이 건축학이었다.

홍익대 건축학과에 진학했지만 적응이 순탄치 않았다.

맨날 설계도면 보면서 촘촘하게 줄 긋는 일이 그렇게 따분할수 없었다.

방황 끝에 남들보다 3년이나 늦게 대학을 졸업하던 해 지도교수는 그에게
처음으로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될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그는 뜻밖에도 교수의 제의를 거절하고 본가가 있던 경기도 광주
농장으로 내려가고 만다.

1년 반동안 소 키우고 과수원을 돌보던 그는 인테리어 디자인 사무실을
차려보자는 친구의 말에 솔깃해 그제서야 이 일과 인연을 맺었다.

그게 88년이었다.

뜻하지 않게 시작한 일이었지만 재미가 쏠쏠했다.

카페 레스토랑 사무실 등 일감이 심심치 않게 들어왔다.

"그땐 정말 자유롭게 일했어요. 실험성도 강했죠. 카페 벽면을 전부
파랗게도 했다가 시커멓게도 했다가 말이죠. 극도의 단순함을 추구했어요.
이제와서 보니 그게 요즘 유행하는 미니멀리즘이란 건데 그땐 그런 이론도
모르고 무작정 덤벼들었죠. 무식하면 용감하다고들 하잖아요"

때마침 국내에서도 인테리어에 대한 관심이 커져가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사상 처음 무역흑자를 기록하며 소득이 높아지자 쾌적한 환경에 대한
욕구도 함께 늘어났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운 좋게도 시기를 잘 탔다고 말한다.

최씨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를 의사로,건축주를 환자로 비유한다.

환자가 의사에게 증상을 설명하듯 건축주는 어떤 환경이 자신에게 가장
편리한지, 어떤 구조를 원하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상황을 종합해 디자이너는 최적의 설계를 처방해 준다.

"인테리어의 시작은 버리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쓰지 않는 물건이지만
의외로 막상 자기 손을 떠난다 생각하면 주저하는게 보통 사람의 반응이죠.
그래서 버릴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집안을 아름답게 꾸밀수 있어요. 그
댓가는 절제미, 단순미, 여백의 미로 나타납니다"

그는 아직 우리나라의 인테리어 수준이 디자인 선진국에 비해 20~30년
뒤처져 있다고 고백한다.

그만큼 발전 가능성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올해부터 시작한 대학 출강에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

"저도 열심히 일하겠지만 자라나는 후배들이 더 큰 역할을 해줄 것으로
믿고 있어요. 한걸음 한걸음 따라가다보면 우리도 어느덧 디자인 선진국
대열에 들겠죠"

< 박해영 기자 bono@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9일자 ).